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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이 여름, 나의 뜰에는(오정희 소설가)

소설가 오정희 씨의 네 번째 글 근 30년에 걸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마당 있는 집에서 살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나의 꿈은 뜰에 아름다운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작가 양순석의 소설 제목처럼 ‘나무가 아름다워지는 시간’을 살고 싶었다. 하여 철따라 모습이 달라지고 해마다 둥치가 굵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오래된 낡은 옷을 입고 옛날 책들을 천천히 읽으리라 생각하였다. 땅을 마련하고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오랫동안 집을 짓지 못하였지만 잡초밭으로 묵혀두고 있는 집터를 둘러볼 때면 그곳에서 살아갈 미래의 내 모습을 환영처럼 보곤 하였다. 해묵은 나무 아래 작은 탁자를 놓고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무얼 쓰거나 읽는 것. 어쩌면 소혹성의 어린 왕자처럼 작은 의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조금은 쓸쓸하고 적막하고 행복해 보이는 정경도….


마침내 집을 짓고 몇 그루의 어린 나무를 심었지만 그것을 키우는 것은 오로지 세월의 일인지라 꿈꾸던 ‘나무 아래’의 멋은 아직 없어도 그늘이 없는 뜰에 대신 세상의 모든 하늘이 찾아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제까지 언제나 보아왔던 하늘이요 땅이건만, 나의 뜰에서 풀과 흙을 딛고 바라보는 세상은 훨씬 깊고 광활하였다. 나이가 주는 새삼스러운 경이로움이 당연하고, 무심하던 자연에 대해 다른 눈과 각성을 틔워주는 면도 있었겠지만 하늘과 구름의 발견은 축복이었다. 섣부르게 ‘나의 뜰에 세상의 모든 하늘이 찾아왔다’라고 표현했지만 반대로 내가 그들의 세상에 초대받았다고 정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당에서 김을 매다가, 쌀을 안쳐놓고 텃밭에 푸성귀를 뜯으러 나왔다가, 방문한 손님을 배웅하다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 생이요,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사를 구름에 비유하며 삶의 그 찰나성과 무상성을 일깨우는 선인들의 말씀이 새삼 마음에 닿아 어떤 종류의 해방감이나 허허로움을 맛보는가 하면, 사랑이란 나무·구름·바위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소설 속 외로운 방랑자의 독백이 떠오르기도 하고, 장엄한 노을로 서쪽 하늘이 불지른 듯 타오를 때면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 시인 박정만의 단 두 행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절창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하여 적막한 심사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구름 모양에서 온갖 형상을 상상해내고 신기해하던 어린 시절 이래 구름이 공기 중의 수분이 엉겨 대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물방울이거나 얼음 알갱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신비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꿈이요 몽상이요 은유로 작용하는 것이다.

  

거의 한 세기를 살고 계시는 어머니는 문득문득 뭔가 어리둥절하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라는 생뚱스러운 질문을 던지신다. 우리는 짐짓 유쾌한 농담인 양 “엄마가 시인이 되셨네. 철학자가 되셨네” 하며 킬킬대는 것으로 답변을 피하지만 어머니가 이미 생과 사의 경계 저편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느낌에 가슴이 서늘해
지곤 한다. 하긴 어머니에 비해 아직은 퍽 젊다는 나 역시 빛과 어둠이 서로 스미어 고요히 잦아드는 저물녘 나의 뜨락에 서면 마치 중음의 세계에 든 듯 현실과 환상의, 삶과 꿈의,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모호해지지 않던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며’ 날던 새들이 깃들일 곳을 찾아 날개를 접고, 뜨거운 여름, 명랑하고 치열하게 절정의 시간을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아직 뜰의 가장자리에서 머뭇대며 희미하게 엷어져가는, 곧 스러질 빛의 끝 저 너머 무 無라고도, 영원이라고도 적멸이라고도 하는 세계가 희끗한 자락 비치지 않던가. 그래서 이 여름날 나의 작은 뜰에서의 하루가 한 생애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우주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여름의 한복판에서, 이 여름이 떠나고 말면 쓸쓸해서 어쩔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정희 선생은 넉 달 동안 생, 로, 병, 사를 한 달씩 글로 풀어냈고 이번이 마지막 주제인 ‘사 死’입니다. 선생은 워낙 삶과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예의로 가득찬 성품이기에, 이 염천에 죽음이란 주제를 독자에게 던지는 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오랜 고심 끝에 선생이 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여름날 뜰을 거닐며 한 생애를 느끼고 되뇌인 흔적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은 후에 전 다짐했습니다. 여름이 떠나도 쓸쓸해하지 말아야겠구나, 이 하루가 곧 우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