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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꽃눈과 잎눈의 말

경북 예천 은풍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분이 말했다. “사과는 떨어지기 전에 꼭 가지에 꽃눈을 만들어 놓고 내려와요. 훗날 자신과 닮은 사과 열매가 거기에 달리기를 바라면서요.” 수십 년째 명품 사과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분인데, 그분의 혜안이 놀랍다. “사과나무의 경우 여름철부터 꽃눈이 생성되는데, 이른 봄 가지치기를 할 때 꽃눈이 얼마나 달렸는지 반드시 살펴봐요. 그걸 어려운 말로 분화율 조사라고 해요. 분화율에 따라 가지치기의 횟수와 강도를 조절하죠.” 꽃눈을 만드는 사과나무의 마음이나 꽃눈을 헤아려보고 사과 열매를 짐작하는 농부의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가을철에 사과의 수확 시기가 늦어지면 사과나무의 양분이 사과 열매로 과하게 집중된다. 그러면 꽃눈은 양분이 부족한 상태로 겨울을 나게 된다. 그 결과 꽃의 생식 능력은 저하되고, 부실하고 맛없는 열매를 맺게 될 위험에 처한다고 한다. 잎눈도 마찬가지다. 사과 농사를 짓는 분들은 봄에 나무마다 잎사귀의 개수를 헤아려본다. 잎사귀가 60개 안팎으로 달려야만 가을에 좋은 사과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봄에 꽃이 많이 피었다고 튼실한 사과가 열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장마철에 폭우가 심해 잎사귀가 떨어지거나 짓무르면 착과율이 떨어진다는 것. 


꽃눈과 잎눈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훗날 매달리게 될 열매와 잎을 생각한다. 보통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고 있으면 꽃눈, 꽃눈보다 길쭉하게 생긴 상태면 잎눈이라고 보면 된다. 꽃눈과 잎눈은 수십 겹의 내의를 껴입고 겉으로는 솜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겨울을 난다. 솜털이 달린 점퍼―실은 철갑처럼 단단하게 장수처럼 무장하고 혹한에 맞선다. 


백목련은 꽃눈과 잎눈의 크기가 다른 나무보다 커서 금방 눈에 띈다. 한번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백목련 꽃눈을 하나 따서 칼로 잘라본 적이 있다. 그때 꽃눈 속에 차곡차곡 들어앉은 암술과 수술들은 눈이 시리도록 앙증맞고 아름다웠다. 잠깐 행복했지만 나는 꽃을 절취하고 절단했다는 자책으로 며칠을 보내야 했다. 


식물의 꽃눈을 한자로는 ‘화아花芽’라고 한다. ‘아芽’는 싹이다. 이 싹이 몸이라는 그릇을 지니게 되면 ‘화기花器’라고 하며, 거기에서 수술과 암술이 생겨 개화하면 화사한 ‘화관花冠’을 쓰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꽃눈이 열매를 위해 꽃을 피워 올리는 일을 하는 동안 ‘엽아葉芽’라고 부르는 잎눈은 손을 펼쳐 햇빛이 주는 영양분을 받을 준비를 한다. 자신이 지닌 것을 사과 열매에게 건네주기 위해. 꽃눈과 잎눈의 역할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 사과나무의 경우 새로 나온 가지가 2년쯤 되어야 꽃눈이 생기고, 그 꽃눈은 그다음 해에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러니까 하얀 사과꽃을 피우기 위해 사과나무는 무려 3년 전부터 애쓰며 준비를 해온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 식탁 위의 사과 한 알도 그렇게 멀리서 왔다. 


저 바람 부는 과수원에 앙상한 몸으로 서서 결실을 미리 준비하는 사과나무, 3월 말쯤이면 주먹보다 큰 흰 꽃을 터뜨릴 백목련, 그리고 입춘이 지나면 강변의 버들강아지 꽃눈들도 수런수런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식물과 사람이 똑같이 행복해지는 때가 머지않았다. 


 

하 수상한 시절에, 그런 시절이어서 더더욱 어른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꽃눈과 잎눈 이야기로 주름진 심사를 살살 매만져줍니다. 우리는 ‘무려’ 얼마 전부터 애쓰며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요? 눈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시인의 글을 한 줄 한 줄 되짚으며 자신만의 ‘무려 얼마 동안’을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국내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15개국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백석평전〉 〈그런 일〉 등의 산문도 냈습니다.


 

글 안도현(시인) | 담당 최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