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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빨간 점퍼

아버지께 겨울 점퍼와 운동화를 갖다 드리러 충남 서산에 갔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출발하니 점심때가 좀 지난 오후 2시였다. 시골 어른들은 밥을 일찍 드시는데 아들이랑 같이 먹으려고 촌닭을 삶아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몇 해 전 아버지는 위암 수술을 받으셨다. 초기에 발견해 수술이 수월했다.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위를 절제해 작아진 몸피에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다. 살이 빠져서 옷이 클 거라면서, 점퍼를 걸치고는 “크지?” 묻는 아버지께 나는 “안 커요. 오히려 작아 보여” 했다. 아버지는 내게 늘 크게 보이기에.

거의 30년 전,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그때 농구에 빠져 있었다. 매달 동네 서점에서 〈루키〉라는 농구 전문 잡지를 사 봤는데, 거기 독자 이벤트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모월 모일 잡지사에 방문하면 선착순으로 농구공, 점퍼, 농구화 등을 준다는 것이었다.

‘아빠’라는 유아용 호칭을 쓸 때니까 아빠를 졸라서 잡지사까지 봉고차를 타고 갔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는데, 사은품은 랜덤이라 갖고 싶던 농구화 대신 미국 프로야구팀 보스턴 레드 삭스의 빨간 야구 점퍼를 받았다. 딱 봐도 기장과 품이 다 큰 그 점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퍼를 입고 “크지?” 묻는 내게 아빠는 “하나도 안 커. 딱 맞네. 잘 어울려” 했다.

중학교 2학년쯤 되니 그 야구 점퍼가 제법 어울렸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IMF 사태로 아버지의 가방 공장이 쓰러졌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한 해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빨간 점퍼를 입고 아버지 없는 사춘기를 통과했다. 더 작은 집으로, 그보다 더 작은 집으로 해마다 이사를 했다. 엄마는 새벽까지 식당과 빵 포장지 공장에서 일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박스를 주웠다.

어느 날, 아버지가 1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를 본다는 맘에 설레어 토요일 방과 후 성남 비행장에 갔다. 이른 봄날이라 교복 위에 빨간 점퍼를 걸쳤다. 에어쇼의 비행기들이 일으킨 모래바람 속에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나는 소시지를 실컷 먹는다며 친구와 마냥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빨간 모자챙 아래 그 웃음이 실은 울음이었음을 알았을 때 더는 빨간 점퍼가 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 아버지가 어려웠고, 살가운 말이 안 나왔다. 몇 번 더 이사를 다니면서 점퍼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빨간 점퍼는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던 유년의 마지막 페이지, 그 덮여버린 책장에 끼워진 빛바랜 삽화가 됐다.

살 빠진 아버지와 함께 닭을 뜯었다. 다리 두 개는 다 내가 먹었다. 닭은 2시간쯤 삶았을 텐데 아들은 2시에 도착해 2시 반에 나섰다. 아버지가 챙겨준 막걸리식초와 호박과 말린 우럭을 들고. 집에 와 쌀뜨물에 우럭젓국을 끓였다. 뽀얗게 우러나는 흰 국물이 꼭 옛날의 햇살 같다. 희끄무레하고 부윰한 베지밀 빛깔의 그 이른 봄볕 속에 빨간 모자를 쓴 아버지와 빨간 점퍼를 입은 내가 있다.

그리 달려가 왈칵 안기고 싶지만, 아니다. 이제 저 빨간색을 지나간 세월에서 꺼내와야 한다. 행복은 추억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다. 단풍에서 가을이 시작되듯, 마음 붉어지는 자리에서 사랑이 시작되듯 저 빨간색은 내 마음의 스위치다. 누르고 나를 작동시켜 내가 아버지를 안아야 한다. 늦지 않았다. 겨울에도 환하게 우러나는 빛처럼, 지금부터 번져갈 행복도 있을 테니까.


 

모든 붉은 것은 아프고 뜨겁고 유한합니다. 이상 기온으로 늦단풍이 한창이던 11월 중순, 시인이 보내온 짤막한 글 속에 붉은 마음이 한가득이더군요. “추억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라 쓴 행복. 시인의 말대로 행복 또한 아프고 뜨겁고 유한할 것이므로  늦지 않게 시작해야겠습니다.

이병철 시인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에 시가, 〈작가세계〉 신인상에 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 〈빛보다 빛나는 어둠을 밀며〉 〈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 〈시간강사입니다 배민 합니다〉 등을 펴냈고, 김만중문학상· 윤동주문학상·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습니다.



글 이병철(시인, 문학 평론가) | 담당 최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