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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두통약이 가르쳐준 행복

인류를 두통인과 비두통인으로 나눈다면 나는 명확히 두통인 쪽에 속한다. 혹시라도 ‘세계 두통인 협회’ 같은 단체가 있다면 협회는 두통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를 핵심 부서에 고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날 밤, 한동안 잠잠하던 내 잠자리에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두통인은 안다. 이것은 모른 척한다고 슬쩍 사라질 종류의 통증이 아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청하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그날은 징검다리 연휴의 초입. 퐁당퐁당의 첫 번째 ‘퐁’에서 ‘당’으로 넘어가는 밤이었다. 몹시도 바쁜 첫 번째 ‘퐁’의 날에 나는 뇌를 풀가동하며 지냈고, 곧 깨어날 아침엔 오랜만에 사람 구실을 하러 부모님을 모시러 가기로 단단히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전날의 피로와 다음 날의 책임감. 두통이 창궐하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머리가 아프다고 간만에 단잠에 빠진 가족들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거듭된 촬영과 야근으로 집안의 여론은 내게 몹시 불리했다.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부엌의 두통약 상자를 열었다. 

늘 먹던 약 두 알로 될까? 먹고 잠을 청하다 낫지 않으면 또 일어나야 하나? 두통은 육중한 스피커처럼 서서히 데시벨을 높이는 중이었다. 지금 잡지 않으면 나는 두통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지금 확실히 진화해야 한다. “정말 통증이 심하시면 이 두 종류의 약은 함께 드셔도 좋아요”라는 동네 약사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생수와 함께 두 종류의 두통약을 털어 넣고, 나는 가족들 모르게 다시 조용히 잠자리에 누웠다. 

밤의 단점은 생각을 끝없이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두통을 베고 누워 나는 뇌출혈에 대한 기사를 떠올렸다. 뇌출혈이 오기 전엔 머리가 그렇게 아프다던데, 이대로 쓰러졌다가 가족들이 아침에서야 그 사실을 알면 어쩌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속 이선균 배우의 대사가 떠올랐다. “당장 죽고 싶지만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이 쪽팔려서 오늘은 안 되겠어”였던가. 아침에 병원에 실려 가게 되면 내 속옷도 만만찮을 텐데, 옷이라도 갈아입고 누워야 하나. 피식 웃다가 나는 옅은 잠에 들었다. 온통 밤을 새운 건지, 밤을 새우는 꿈을 꾼 건지 알 수 없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두통이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말은 두통인에게는 오만한 표현이다. 그러니 예의 바르게 ‘거의’라는 부사를 더해본다. 두통이 거의 사라졌다. 두통님이 다녀가셨고 그분이 문을 완전히 닫고 가지 않으셔서 여전히 문밖에서 옷자락이 팔랑거리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그분이 문밖을 나가셨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이제 나는 오랜만에 사람 구실을 하러 부모님을 모시러 갈 수 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맞이한 가을 아침,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선선하고, 나는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에 비해 그저 하루만큼 늙었을 뿐, 내 통장 잔고도 몰고 있는 차도 같은데, 나는 명백히 행복했다. 운전하면서 내내 생각했다. 행복하다, 왜 이렇게 행복하지…. 그러다 흥미로운 생각에 닿았다. 

특별함의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슬픔의 ‘부재’도 행복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완벽하게 평범한 상태도 얼마든지 행복의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다. 내가 평범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돈, 큰 집, 빠른 차가 없어도. 비행기표를 끊고 웨이팅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리며 맛집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단지 머리가 아프지 않은 오늘, 올여름의 열기와 습기가 사라진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온몸으로 행복했다. 새로운 질감의 기쁨이었다. 지난밤, 세 알의 두통약이 가르쳐준 행복이었다.



행복은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라는 말 모두 들어보셨죠?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비록 크고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찾아서 성취할 어떠한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구나하며 조금 삐딱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하기’가 아닌 ‘빼기’도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말하는 이 글을 읽으며 행복은 정말 매 순간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두통 없이 맑은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으니까요. 

유병욱 ECD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석사를 마쳤습니다. 글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해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브랜드를 위한 광고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외국계 광고대행사 TBWA KOREA에서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로 일하며 아시아나항공, 우리금융그룹, 퍼시스 같은 브랜드를 위한 광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광고는 재치나 유행어보다 브랜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틈틈이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창의적 생각을 부르는 태도에 관한 책 <생각의 기쁨>, 인생의 보석을 발견하는 방법론 <평소의 발견>, 코로나19 시대에 우리에게 찾아온 변화에 대한 이야기 <없던 오늘>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11월, 네 번째 책 <인생의 해상도>를 선보입니다. 


​글 유병욱(TBWA KOREA ECD) | 담당 양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