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7월 걷다 보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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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갔던 우동집을 다시 찾아가 “10년 전 여기 왔는데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하니 주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장사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반가워했다.
이른 아침 들어간 커피숍 한쪽에 불상이 놓여 있어서 물어보니 주인이 승려였다. 카페에서 요리와 서빙을 하는 스님이라니. “제가 스님이 맞긴 한 데 스님이 직업은 아니랍니다. 스님이란 제가 삶을 대하고 살아가는 방식이니까요.” 오오, 뭔가 심오한 이야기 아닌가.
재즈 음악을 LP로만 틀어주고, 위스키나 클래식 칵테일이 아닌 다른 것을 주문하는 손님에게 정중하게 “여기는 그런 것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바텐더 할아버지.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자신감은 저런 것일까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많이 걷다가, 걷다가 길을 잃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발견한 것이다. 오랫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뭘 할지 모르겠는, 아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진공과도 같은 상태가 시작되었다. 예전과 다르게 살아봐야지 새삼 결심했는데,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작가인 오마에 겐이치의 오래전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인간을 바꾸려면 시간을 달리 쓰거나, 사는 곳을 바꾸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그냥 결심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나의 실행력을 보여주겠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바꿔볼 가장 빠른 방법은 여행이니, 간단히 짐을 챙겨 교토로 갔다.
예전과 다르게 한 달 동안 밥 먹고 여기저기 다리 아프게 종일 걸어 다니다 돌아와 잠을 잤다. 그것이 여행 일정의 전부였다. 텔레비전도 넷플릭스도 보지 않았고, 휴대폰으로 10분이 멀다 하고 메일과 문자 확인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아는 사람들 속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대신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 속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 대부분의 말을 그저 배경음악처럼 흘려보냈다.
어떤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쓸데없는 레퍼런스가 너무 많아져서 눈앞에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무얼 하나 보거나 듣거나 하면 그와 연관되었거나 별 연관도 없는 것이 계속 가지를 쳐나가 머릿속이 열대우림처럼 무성해진다.
뭔가 바꾸고 더 나아지려면 예민함이 필수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예민하다. 하지만 인생의 또 어떤 시기에는 예민함 대신 ‘뭐, 지금 상태도 나쁘지는 않잖아’ 하는 무던함이나 무심함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서 거리로 나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지워버리는 연습을 하기에 길 위처럼 좋은 곳은 없다. 지나간 일을 반성하지도 않고 다가올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담대함을 갖추는 연습.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이른 아침 빵 굽는 냄새가 정말 고소하고, 여름철 수국이 비현실적인 푸른색과 핑크색으로 피어나며, 등교하는 아이들 손에 들려 있는 소설책을 살펴보는 연습.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엄청난 사기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매일 아침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사악한 범죄를 기획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열심히 걷는 동안에는 ‘나쁜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걷는다고 대단한 해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주변을 바라보다 그냥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볼 뿐이다. 돈과 상관없이 그냥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다음 주에 어떤 전시를 보러가지? 집에 가득 찬 불필요한 물건 중 뭘 먼저 정리할까? 세상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질문과 그 대답이라는 것을 걷다 보니 알게 되었다.
지난 4월, 김은령 전 디자인하우스 부사장이 30여 년의 회사 생활을 갈무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궁금했습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인생의 한 챕터를 반추하며,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워밍업에 한창인 이가 찾은 행복론은 무엇일지요. 역시나! 회사에서 보여주던 모습처럼 담백하지만 읽는 이가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디자인하우스에 재직하며 〈행복이 가득한 집〉과 〈럭셔리〉 편집장, 매거진본부 본부장을 거쳐 부사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외 <두 여자의 인생 편집 기술> <밥보다 책> <Luxury Is> <비즈라이팅> 등의 책을 썼고,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침묵의 봄> <설득의 심리학>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 등 30여 권을 번역했으며, 조선일보와 대한항공 매거진 〈모닝캄〉 등에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글 김은령(전 디자인하우스 부사장) | 담당 양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