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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차별과 편견 속에 피어난 자부심

지인들과 만나면 투자를 통해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북새통이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위해 경제 공부에 몰두하고 코인에 투자하는 게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투자로 재산을 축적하는 방법이 주목받으면서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도 등장했다. 그만큼 일하면서 사는 게 고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이라 그 대열에는 끼지 못하지만, 월요일 아침 눈을 뜨며 ‘출근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고민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자주. 

 

그래서였을까,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봄부터 겨울까지 이른바 블루칼라 여성들의 일터를 찾아 그들의 삶과 노동을 취재했다. 부산 신항에서 화물차 운전 기사로 일하는 김지나 씨,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신연옥 씨, 철도차량 정비원으로 철도를 수리하는 하현아 씨, 공장의 배관을 이어 용접하는 플랜트 용접 노동자 김신혜 씨, 목조 주택을 짓는 빌더 목수 이아진 씨 등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열 명을 만났다. 

 

신혜 씨는 50kg이 넘는 알곤 용접기를 양쪽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메고 다녔고, 열차끼리 붙이고 떼는 입환 작업을 위해 현아 씨는 온몸에 기름때가 묻도록 열차 연결 장치를 당겼다. 연옥 씨는 2층짜리 형틀 거푸집을 설치하느라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이들은 “현장은 원래 그런 곳”이라며 고강도의 거친 육체노동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편견과 차별은 참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여성 노동자를 일하러 온 게 아니라 놀러 온 것처럼 여기는 이도 있었고,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 가서 먹고사느냐며 따지는 이도 있었다. “방 잡고 놀자”는 등의 성희롱도 부지기수였다. 

 

적대적인 일터였다. 거친 노동, 마초적 동료 문화, 여자 화장실조차 없던 일터, 표준 남성에 맞춘 도구들⋯ 무엇 하나 그들에게 친절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선연하게 살아 있었고,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햇볕에 얼굴이 다 타고, 땀에 절었어도. 주름이 깊게 파이고, 먼지로 뒤덮여도 자신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여자 기자에게 그들은 너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신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겼다. 

 

“이런 얘기를 하면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라고 웃으며 운을 떼던 13년 차 플랜트 용접 노동자 김신혜 씨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신혜 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파이프(배관)를 보면 반갑거든요. 용접하면서 ‘내가 너를 예쁘게 때워줄 테니까 오래오래 잘 있어’라고 최면을 걸어요. 더 일찍 용접을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듭니다”라며 자신의 노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했다. 

 

소음과 분진이 난무하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인터뷰 현장에 그야말로 진이 빠졌다. 하지만 이들을 인터뷰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느샌가 잊고 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내 안에서 부끄럽게 고개를 들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하는 보람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일하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돈이 필요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고 말하는 형형하게 빛나던 그들의 눈이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시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생각보다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고 되뇌어보기도 한다. 내 일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니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자부심으로 빛나던 블루칼라 여성들이 일깨워준 ‘일하는 보람’을 느끼며 당분간 아침 출근길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별과 편견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납니다. 물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기둥은 존재하죠. 바로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행복> 독자에게 들려준 박정연은 현재 <프레시안>에서 정치부와 사회부를 오가며 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사회부에 있으며 이른바 블루칼라 현장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나, 블루칼라 여자>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지난해 봄부터 겨울까지, 최고 온도 35°C를 육박하는 폭염이 있던 날 아파트 건설 현장에 포대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온몸이 땀으로 쫄딱 젖기도 하고, 좁은 골목과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레미콘 운반 ‘두 탕’을 함께 하기도 했죠. 어디선가 분진이 휘날리고 중장비 소음이 울려 퍼질 듯한 이 생생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이 보여준 삶의 용기와 기운을 전했습니다. 현재는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하고 있지만, 취재 수첩을 들고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이들보다는 구조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몸이 기웁니다. 그는 오늘도 오해 없이 듣고 정직하게 쓰겠다는 다짐을 하며 취재 현장으로 향합니다.

 

 

글 박정연(<프레시안> 기자) | 담당 양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