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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감자 한 알의 행복

씨앗을 심을 계절이다. 매해 제일 먼저 심는 씨앗 중 하나가 씨감자이다. 감자는 서늘한 날씨를 좋아해서 이른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심는다. 요맘때나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면 내버려둔 감자가 싹이 튼 모습을 봤을 것이다. 나를 땅에 심어달라는 감자의 외침이다.

 

지난해 말, 나는 한 토종 감자의 사연을 접했다. 경북 봉화에서 들은 이야기다. 봉화는 한 면이 울진과 이웃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강이 하나 흐른다. 해방되기 이전, 강 건너 산골짝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먹을 것이 워낙 귀하던 시절이라, 여자애가 나이가 좀 차면 입을 하나라도 덜려는 요량으로 때 이른 시집을 보냈다. 이 아이 역시 그런 운명이었다. 부모의 뜻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불며 시집을 갔다. 안타깝게도, 시집 역시 형편은 매한가지였고, 새댁은 배를 곯기 일쑤였다. 

 

어느덧 장마가 시작되었다. 친정과 시집을 가로지르는 개울은 물이 불어나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어린 새댁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당을 둘러싼 사립 울타리에 커다란 지게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감자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빨간 감자와 자주 감자. 시집온 동네에서 기르는 감자는 아니었다. 지게를 찬찬히 살펴보자 친정 오라버니가 쓰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누이를 시집보내고 걱정이 된 오빠가 감자를 캔 뒤 한 짐 80kg을 짊어지고 30리 산길을 굽이굽이 넘어 다녀간 것이다. 도착하니 밤. 사돈을 깨울까 봐 염려한 오라버니는 조심스럽게 지게만 세워두고 갔다. 동생은 엉엉 울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마을은 빨치산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새댁은 번갈아 마을을 차지하는 북한군과 국군에게 먹을 것을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오빠의 감자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씨감자를 땅을 파고 묻어 숨겨서 지켰다. 어린 새댁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매해 심어 거두었기에 이 감자는 살아남았다. 농사를 지으려 귀향한 다른 젊은 농부의 손에 대물림된 2014년까지 말이다. 

 

토종 감자는 동란과 가난의 시절을 거쳤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고 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심었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토종 감자는 알이 잘고 눈이 깊어 울퉁불퉁한 데다 색깔이 다양해 보는 재미가 크다. 아린 맛도 난다. 그래서 봉화에서는 감자를 껍질째 삶지 않는다. 반달처럼 닳아버린 놋숟가락, 지역 말로 ‘빼떼기’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해 껍질을 살살 긁어낸 뒤에 삶으면 아린 맛이 없다고 한다.

 

어머님이 대물림해주신 씨앗을 잃어 떠돌이 머슴살이를 하며 악착같이 씨앗을 다시 모은 한 토종 농부는, 돈도 안 되는 씨앗에 왜 그리 집착하느냐는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시를 썼다.  

 

쌀밥 한 그럭이 원이 없던 시절 
얼마나 됐다고  
그 얼마나 되었다고  
잃어버린 행복들

 

올해도 장마는 올 것이다. 농부들은 감자를 캐느라 부산할 것이다. 소금을 휘휘 저어 푼 물에 삶아낸 햇감자는 오늘날에는 어쩌면 음식 축에도 못 들 것이다. 하지만 감자가 지구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시 싹을 틔웠기에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다. 어떤 감자 한 알에는 오빠의 사랑, 가난의 슬픔, 주린 배를 채우려 베어 물 때의 행복이 기억으로 담겨 있을 것이다. 

 

만물 생동의 계절, 씨감자 한 알에서 이렇게 묵직한 행복론을 발견해내다니요. 2년 전 <행복>의 플랜테리어 특집 프롤로그를 쓴 것을 계기로 시작된 인류학자 황희선과의 인연.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쓰는’ 글쓰기 상수上手에게 4월 식목일을 앞두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청탁했습니다. 그 결과는 감자라는 토종 작물과 사람이 맺어온 역사를 응축한 이 짧은 글이 그 결과물입니다. 황희선은 서울대학교와 런던 정경대학에서 생물학과 사회문화인류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토종 작물과 사람이 맺는 다종적 역사 및 관계를 주제로 박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3~2011년 연구 공간 수유+너머에서 동료들과 인문학 공부를 하며 강의를 했고, 2015년 이후로는 텃밭에서 씨앗 받는 농사를 짓고 화초를 기르면서 생물 다양성과 관련된 연구 주제와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세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능성들>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을 함께 썼습니다.

 

 

글 황희선(인류학자)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