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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장래 희망을 묻는다면

한때 나는 등산을 좋아해 주말마다 산에 올랐다. 텐트 없이 침낭 속에서 자는 비박을 하기 위해 야간 산행을 하기도 했다. 더 자랑해보자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마추픽추로 향하는 잉카 트레일에도 간 적이 있다. 하지만 모두 20 여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업계(?) 후배들이 한라산에 오르자고 했을 때 나는 잠시 그 시간의 간극을 깜빡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보통 10시간이 걸린다는 관음사 코스를, 눈 덮인 계절에, 스무 살도 넘게 나이 차가 나는 그룹에 끼어 등반할 마음을 먹었을 리가 없다. 휴대폰 액정에 뜬 ‘국립공원 탐방 예약 완료’ 문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제야 실감과 함께 걱정이 확 몰려들었다. 

 

그뿐 아니었다. 팬트리 깊숙이 처박혀 있던 등산 장비를 꺼내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깨달아야 했다. 나의 등산 이력과 마찬가지로 장비 역시 모두 20년 전 물건이라는 것을. 옷과 모자는 물론이고 배낭, 스틱, 아이젠, 스패츠 모두 낡고 크고 무거운 구식이었다. 10년 전에 바꾼 등산화가 그나마 새 장비였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모처럼 가족들과 서울 성곽길 나들이를 나선 날이었다. 앞서 걷기 시작한 남편을 무심히 따라가는데 갑자기 남편의 발밑으로 검은 조각 같은 것이 떨어져 나왔다. 등산화 뒤축이었다. 한 발을 더 옮기자 등산화 옆 부분이, 그다음 걸음에는 밑창이, 마치 발자국처럼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산화가 하도 닳고 삭아서 부분별로 분해되는 중이었다. 앞코만 남은 등산화 ‘일부’를 신은 채 남편이 걸음을 멈출 때까지 우리가 그 ‘신발 해체 쇼’에 열광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날 남편의 것과 똑같은 낡은 등산화를 신고 있던 나는, 나에게도 닥쳐올 게 분명한 그 사태를 막기 위해 새 등산화를 장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정도나 되어야 오래된 물건을 버리는 사람이다. 낡은 등산 장비를 꺼내 놓으니 내 눈앞에서 한라산이 점점 더 멀어지고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나는 시간의 간극을 호되게 실감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한라산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운 좋게 날씨도 좋았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선명한 설산과 백록담에 담긴 신비로운 푸른 물을 굽어보며 고생대 화산에 대한 상상을 했고, 정상석 앞의 기나긴 인증 숏 대기줄 앞에서는 SNS 시대 업로드의 노고를 실감하기도 했다.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는 방법으로 ‘미운 정’을 실컷 쌓았는가 하면, 하산길이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바람에 신성한 산에 대고 불경스러운 욕을 중얼거렸다는 것도 고백해둔다. 해피 엔딩이니까 용서가 되겠지 하는 속셈으로. 무엇보다 그날의 해피 엔딩은 내가 후배들에게 ‘등산 꿈나무’로 공인을 받은 일이었다. 20년 전에 전성기를 보내버린 사람이 당치 않게 꿈나무라니? 그것은 등반을 앞두고 모인 술자리에서 내가 말한 용어였다. 누군가 장난 삼아 각자 ‘장래 희망’을 말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등산 꿈나무가 되겠다는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은퇴자의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정말로 초보자로서 등산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게 뭐가 다르냐고?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늘 새롭고 낯선 일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 살아본 적 없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그러니 ‘모르는 자’로서의 행보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훈련 한두 개쯤은 해봐도 좋지 않을까.” 이것은 내가 쓴 산문집의 한 구절이다. 초보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호기심을 해소하거나 숙제를 해내는 배움의 태도와는 다를 것이다. 자신이 지닌 조건을 미리 판단하거나 규정짓지 않으며 손익과 성패에 흔들리지 말고 일단 문을 활짝 열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명랑’과 ‘담대’의 마음뿐 아닐까. 사실 이 두 가지는 나이 한 살을 보탤수록 더해가는 심신의 위축을 벗어나기 위한 나의 새해 다짐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새 장비 정도가 아닐까. 맞다. 나는 새 장비 몇 가지를 마련했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 만큼 부동산 이슈가 더 커지고 말 았지만 뭐, 꿈나무에게 그 정도 탐욕은 허용되지 않을까 한다. 

 

“그의 신작이 나왔다는 것은 뉴스가 되지만, 그 작품이 좋다는 사실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로 이변이란 없이 좋은 소설을 발표해온 소설가 은희경. 작년 8월, 12년 만의 신작 산문 <또 못 버린 물건들>이 나온 때부터 줄기차게 졸랐습니다. <행복>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요. 그 책은 이변 없이 좋은 산문집이었으며, ‘효율과는 상관없이 함께한 시간과 삶의 궤적이 스민,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들에 대한 글’이라는 테마가 딱 우리 독자들 취향이다 싶었으니까요. 소설가가 되기 전 다니던 출판사가 디자인하우스의 단행본팀이었다는 인연도 들이밀며 반년 넘게 기다린 끝에 듣게 된 은희경 작가의 장래 희망, 귀 기울여보세요. 그의 책으로는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중국식 룰렛> 등,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빛의 과거> 등이 있습니다. 문학동네소설상,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글 은희경(소설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