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2월 세상의 눈치 따위 무시해버려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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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에 건물 한 채 정도 있으면 진정한 건물주요, 부자라 할 수 있다. 내 병원과 회사도 압구정동에 있다 보니, 가끔 건물주 아니냐는 소릴 들을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병원과 회사 모두 임대 건물에 있다.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는 것도 능력이니, 건물주는 못 되어도 병원과 회사의 유명함은 자랑할 만하다. 그렇다면, 모든 걸 갖추었으니 “나는 진정 행복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인 성공 기준으로 보면 분명 능력 있는 의사이고 연구자이면서 성공한 기업가라고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남부러운 것 없고 행복해야 맞다. 하지만 나는 행복과 불행의 차이에 대한 견해를 쉽게 말하기 어렵다. 세상의 기준이 만든 돈과 명예 및 권력이 과연 행복과 비례하는지, 한 번도 행복을 목표와 목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하고 꿈꾼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줄기세포 치료로 난치병 환자가 효과를 보면 의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연구 성과가 좋아서 회사 주식이 막 오르고, 이사와 주주들이 신난 걸 보면 경영자의 능력 덕분인 것 같아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 인정과 능력이라는 결과물을 만들기까지 나는 적지 않은 책임과 의무감에 시달렸고, 더 큰 성장을 위해 계속 달려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성공과 행복은 다르다고, 행복은 결과물이 아니라 순간의 느낌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객관적 의미로의 행복은 이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지만, 나만 누릴 수 있는 행복에는 기준 따위가 필요없다. 세상의 눈치 따위는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진료실에 홀로 남아 바흐를 듣고 칸트를 읽으면 충만한 고독이 밀려온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소리와 활자가 주는 행복의 절정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오전 진료를 마친 뒤 간호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국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저절로 웃음이 날 만큼 달콤하고 상큼해서 시들어 있던 행복을 충전시킨다.
20년째 단골인 압구정 골목의 수선집 아줌마는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돈도 많으면서 비싼 청바지 하나 사 입지, 만날 통 줄이고 기장 줄이고, 죽을 때 돈 싸 들고 갈 거야?” 정직하기 짝이 없는 수선집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좋은 사람 같아서 행복해진다. 퇴근 후 아들놈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겁고, 기어이 아빠 주머니를 털어 술값 내려는 아들의 잔머리 쓰는 모습도 귀엽다. 술이 과해 아들놈 팔짱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행복해서 매일 이러고 살까도 싶지만, 아직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등골이 송연해진다.
행복의 정의를 묻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하고, 공동의 목표와 책임도 지녀야 한다. 그런 일상 안에서 순간순간 내가 찾고 발견하는 것이 진짜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중국집에 간다.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치료제를 개발한 연구자 김현수 원장이 자신 안의 두려움을 돌보러 가는 곳이 병원 건물의 옥상이라고 합니다. 고작 몇 걸음 걸으며 한강 바람을 맞는 게 전부이지만, 이 시간은 그에게 열정과 삶 사이의 균형을 찾아주는 고귀한 시간이 되어준답니다. 올 한 해 여러분도 그처럼 ‘옥상 위의 칸트’가 되어보세요. 아주대학교 혈액종양내과 의사였던 그는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며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법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세포 치료제가 의약품으로 분리되면서 연구가 어려워지자, 2002년 대학을 나와 벤처기업 파미셀㈜을 설립했습니다. 10여 년 연구 끝에 2011년, 그는 세계 최초의 줄기세포 치료제인 ‘하티셀그램-에이엠아이(Hearticellgramⓡ-AMI)’ 개발에 성공했고, 이후 적응증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줄기세포 치료 전문 병원 ‘김현수 클리닉’을 설립해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옥상 산책 중 충실히 쌓인 마음의 기록을 모아 책 <옥상 위의 칸트>를 펴냈습니다.
글 김현수(줄기세포 치료제 연구자)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