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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작은 것이 이긴다는 억지

‘억지’는 결을 거스르는 일이다. 주로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나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룰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어이’라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수많은 억지가 세상을 바꿔왔다. 억지는 주변 환경과 화학작용을 하면서 세상을 진화시킨다. 지금까지 해온 것에 대한 회의가 목에 차오르고 그 반작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식이 진정성을 지닐 때 억지는 힘을 발휘한다. 역사에 기록된 억지의 대표적 사례가 혁명이다. 

 

‘작은 것’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얼마큼 작아야 ‘작은 것’인가? 이는 ‘큰 것’의 상대적 개념이다. ‘큰 것’이라 함은 물리적 크기, 의식을 지배하는 영역의 넓이, 힘의 세기 등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그냥 ‘50년 정도 우리의 성장 궤적을 주도한 주류’ 정도로 해두자. 고속 성장의 핵심인 대기업과 그들이 만들어온 대형 브랜드, 우리 삶의 목표점 역할을 해온 빠르고 비싼 자동차, 큰 평수 아파트… 뭐 이런 것 말이다. 그 반대쪽에 선 것을 ‘작은 것’이라고 정의하자.

 

그렇다면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있는 화학작용은 일어나고 있는가? 그렇다(주관적 경험에 따른 확증적 편향일 수 있다). 한참 동안 몰두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곁에 있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초저녁 혼자 남겨진 그런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30년 정도 큰 브랜드를 위한 마케팅, 브랜딩, 광고 같은 일에 고개를 처박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의 내 기분이 그랬다. 거기에 개인적 삶의 변화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커피를 끊고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차를 마시다 보니 명상을 하게 됐고, 명상 덕분에 생각의 공간이 넓어졌고, 넓어진 생각의 공간 속으로 새로운 생각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작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과 개인 삶의 변화 중심에 ‘인터넷’이 있었다. 하이텔, 아이러브스쿨, 페이스북의 형태로 다가온 인터넷은 결국 삶의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존 방식의 마케팅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큰 브랜드의 그늘 아래 포자 형태로 존재하던 작은 브랜드가 의미 있는 크기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제 이긴다’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이기는 것’의 정의가 달라지고 있다. 시장점유율, 브랜드 인지도, 돈으로 환산한 브랜드 가치 등이 더 이상 이기는 것의 기준이 되지 않고 있다. 화학작용 결과 소비자는 더 똑똑해졌고, 그들의 니즈나 취향은 고도화되고 다양화되었다. 행복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진정성을 지닌 작은 브랜드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터넷은 ‘좋은 것’을 빠른 속도로 온 세상에 퍼트리고,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비자는 자신의 삶에 ‘좋은 것’을 끌어들인다. 이런 현상은 크기와 영향력이 정비례하던 관례를 통렬하게 무너뜨리고 있다. 시장점유율이 더 이상 브랜드의 영향력이 아닌 세상이 되고 있다. 오히려 삶에 미치는 영향력의 질이 이기고 지는 것을 결정한다. 서울 재래시장 골목 안 작은 에스프레소 바 앞에 단돈 1천5백 원짜리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서는 현상이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한 가지 기술만 잘 키워온 작은 회사의 초경량 고강도 캠핑 의자가 전 세계 캠퍼의 인생템이 된 것도 같은 현상이다. 퇴출 위기의 백열전구에 디자인을 입혀 소비자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브랜드의 이야기 역시 이기는 것의 정의가 달라졌음을 잘 보여준다. 


시속 15km로 달리는 자전거가 시속 200km의 슈퍼카를 이길 수 있다는 억지가 마음에 와닿는 계절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옆 동네 비건 빵집에 다녀오면 좋겠다. 


올 한 해 <행복>이 독자와 함께 탐구할 주제 ‘Small’를 마케팅·광고 기획 전문가 이근상 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제는 작은 브랜드의 시대. 우주에 흔적을 남기는 작은 브랜드가 돼라!”는 그의 말이 강한 힘으로 독자를 꼬일 거라 믿었으니까요. 그 답은 ‘자전거가 슈퍼카를 이길 수 있다는 억지’로 왔고, 이에 백번 공감합니다. 이근상 님은 광고 회사 코래드에서 광고인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국내 최고의 독립 광고 회사로 평가받던 웰콤에 근무하며 경쟁 프레젠테이션 20연승 무패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부사장으로 퇴사하기 전까지 현대카드, 아이파크, 카스, 오뚜기 등의 광고캠페인과 브랜딩 작업을 했습니다. 이후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광고 회사 KS&Partners(현재 KS’IDEA)를 운영 중입니다. 바디샵, 한국타이어, 한국투자증권, 프로스펙스, 파라다이스 그룹, 아우디, NH투자증권 등 다양한 브랜드를 위해 일하며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브랜드를 위한 책: 우주에 흔적을 남겨라>를 펴냈습니다. 

 


글 이근상(광고 기획자)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