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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도시에서의 삶이 아쉽지 않은 건…

40대를 지나온 나는 8년 가까이 미국의 시골에서 남편, 아이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계획 없이 그냥 살았다. 시골살이 전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취를 위해 부지런히 직장 생활도 하고, 차근차근 학위도 땄다. 시골에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은 그 자체로 풍성해서 글을 썼다. 어떤 독자가 물었다. “도시에서 성취를 추구하지 않은데에서 오는 아쉬움 혹은 후회는 없냐”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결국 “아쉬운 게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해버리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누군가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살았다고 말하려면, 그 누군가는 그럴 만하게 열정적으로 살았어야 한다. 실패든 성공이든 자신을 불살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성공도 실패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았다. 그래서 황급하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에요. 애당초 현재의 나보다 더 발전된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가 없기 때문에 아쉬울게 없는 거예요.” 

시골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은 지천에 열린 야생 베리를 따 먹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같은 맛, 같은 모양, 같은 크기가 단 하나도 없다. 그 베리가 겪어온 계절, 햇빛의 양, 토양의 성질, 주변 식물과의 거리 등에 따라 다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 무조건 더 크고, 내 입에 더 단 것이 더 좋은 과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베리 하나하나가 고유한 것은 그 베리를 만들어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계에 있다. 그 관계 안에서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베리가 된다. 나는 처음 시골에 이사 갔을 때에는 근사한 유기농 농장을 만들고 싶었고, 작더라도 멋진 집을 직접 짓고 싶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목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갔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현재의 나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내가 현재 위치한 고유한 맥락을 관찰하고, 거기에 고유한 내 모습이 그대로 스며드는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족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화목한 가정이라는 정해진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나처럼 그들만의 사람이 되는 자유를 서로 방해하기 않기 위해… 시거나 쓴맛의 베리가 되어도 괜찮은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이기도 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상대를 강요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하고, 상대의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만, 의견을 조율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목적 없이, 서로 관계를 맺고 현재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베리도, 그 옆의 민들레도 각자 자기 자리를 잡고 살아가듯이.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모습으로 살 필요는 없고, 나 스스로도 언제나 일관된 기준을 정해두고 살 필요도 없다. 베리와 달리 나는 한 장소에서 고정될 필요는 없다. 도시에서의 삶이 아쉽지 않은 건 도시가 싫어서가 아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나는 가장 ‘나’답게 존재하기 위해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맺는 관계를 살피고 탐구할 것이다. 변치 않는 건,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굳건하게 나다움을 잃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만 남기고, 일과 기쁨을 하나로 만들며, 빠르게 소비하는 대신 느긋하게 향유하는 법’을 익혀 나가자 이 4인 가족은 단돈 1백만 원으로도 한 달 일상이 풍요로워졌다고 합니다. 바로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자유롭고 풍요로워지는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실험하는 중이지요. 박혜윤 작가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미국 워싱턴 대학교 교육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가족과 함께 미국 시애틀 근방의 시골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요. 지금은 ‘정기적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만큼만 일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삶을 7년째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 일상을 이메일에 담아 정기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며, <숲속의 자본주의자> <오히려 최첨단 가족> <도시인의 월든> 같은 책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