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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8월 집의 탄생

강원도 태백산맥 서편 자락의 목공소에서 집 짓고 가구 만들며 글을 쓰는 내 일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 한 세대 이상을 차곡차곡 쌓아온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느꼈을 최초의 큰 행복은 아마도 내 집을 장만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동굴 밖으로 나와 나무 기둥에 풀이나 잎 혹은 흙과 돌로 지붕을 만들어 최초의 집을 완성했다. 비바람을 피하고 나보다 더 크고 날쌘 맹수의 위협에서도 벗어났다. 지붕 아래서 사랑을 할 수 있었고, 놀라와라! 정주定住했으니 농사를 짓게 되었다. 집은 문명을 잉태했다. 집의 힘을 엿볼 수 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집에 붙이려고 쓴 시가 있다. 

 

“1914년에 
나는 세워졌다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부대끼면서 
나는 언제나 앞날을 내다보았다 
나는 믿었으니 
믿는 자는 살아남으리.” (릴케의 시 ‘집의 탄생’에서 인용) 

 

“보헤미안으로 평생 떠돌던 시인에게 떡하니 집이 생겼다. 이에 감동한 시인은 ‘나는 세워졌다. 믿었으니, 믿는 자는 살아남으리’라고 썼다. 대단한 반전 아닌가? 그는 집에서 희망을 보았다. 집은 멜랑콜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시인으로 우뚝 서게 했다.” 그 시를 읽은 나의 감상이다. 나는 ‘집’이 지닌 힘을 빌려와 세기의 시인을 ‘시인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집은 시나 그림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추위를 막아주는 집, 자연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공간, 우리 조상들은 집을 가지며 비로소 행복을 발견했다. 행복은 경험하는 것.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간은 철학과 이성으로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교육을 더 받고 과학이 발달해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행복은 절로 굴러올 줄 알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안타까운 경우가 있다. 하필 우리와 이웃 일본이 그러하다. 두 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 지수가 OECD 평균에 한참 뒤처진다. 

 

고백건대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알지 못해 체험하지 못한다. 파랑새는 저기 창공에 있을 것이나 행복은 내 집 안에 있는데 말이다. 집(건축)과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가를 나는 오래 집을 지어오면서 선명히 알게 되었다. 물리적 공간의 집이든 기억 속 정서의 집이든 집은 사람을 지배한다. 보들레르는 기억의 집을 잊지 못해 시를 썼으며, 하이데거는 건축가를 대상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1950년 작 <짓기, 거주하기, 생각하기>)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잘 거주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집 이야기에서 카를 융을 빠뜨릴 수가 없다. 꿈을 꾸고 해석하던 정신학자는 그의 손으로 지은 취리히 호숫가 볼링겐 돌집에서 어머니 자궁 안에 있는 평안함을 느꼈노라고 회고록에 남겼다. 카를 융 평생의 수많은 저작은 이 돌집에서 나왔다. 나도 집에서 <집의 탄생>을 썼다. 집이 글을 낳았다. 

 

글을 쓴 ‘나무 이야기꾼’ 김민식 대표의 나무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집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나무로 톨스토이, 고흐, 박경리, 안도 다다오, 호크니를 사유하다 보니 자연스레 반 고흐의 오두막과 르코르뷔지에의 호숫가 집까지 연결되더라는군요. 그 실마리가 이 글 속에도 있으니 주의 깊게 들여다보시고요. 김민식 대표는 한국 목재 산업이 활황이던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 목재 딜러, 목재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나무의 밭으로 꼽히는 캐나다와 북미를 비롯해 전 유럽과 이집트, 이스라엘,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 남섬까지, 그의 나무 여정은 4백만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2006년부터 강원도 홍천 내촌목공소에서 건축가,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목재 컨설팅 및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와 사람, 과학과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깊고 넓은 나무 이야기 <나무의 시간>, 집에 거주하는 모두를 위한 인문학 <집의 탄생>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