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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충분히 좋은

살면서 없이는 살 수 없는 물건 몇 개를 한번 꼽아본다. 모르긴 몰라도 최상위권에 스마트폰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조금 양보해서 많이 곤란할 게 틀림없다.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했고, 지난 밤 못 본 축구 동영상을 관람했다. 배달 앱을 통해 콩나물 국밥을 주문해서 먹고, 내일 일정이 뭔지를 방금 체크 완료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마트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게 하나 있다. 바로 내 스마트폰의 기종이 V30이라는 거다. V30은 출시된 지 무려 4년도 더 넘은 스마트폰이다. 그런데도 아주 멀쩡히 잘 쓰고 있다. 물론 고장이라도 나면 그걸로 끝이다. V30을 만든 LG가 더 이상 스마트폰 사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나는 ‘충분히 좋다’는 개념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 살아간다. 이걸 부정할 순 없다. 자본주의는 참 명쾌하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동일한 제목의 숙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 숙제의 제목, 바로 ‘좀 더’다.  자본주의는 결코 ‘내로남불’ 하지 않는다. 대단히 일관된 태도로 우리에게 ‘좀 더’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충분히 좋다’라는 개념에 대해 곱씹어본다. 어쩌면 여기에 행복의 씨앗이 잠들어 있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해본다.  우리가 ‘좀 더’에 매달리는 이유, 그로부터 쾌락이 발생할 거라고 믿는 덕분이다. 한데 그 쾌락, 어떤 포인트를 넘어버리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이건 심증이 아닌 과학자들이 이미 증명한 팩트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쾌락을 갈구한다. 최신을 갈망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좀 더’의 노예다. 우리 안에서 ‘충분히 좋음’은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다. 

 

요즘 그 어떤 것이든 뭔가를 구입하는 횟수를 극단적으로 줄였다. 내 서재에는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충분히 좋은’ 책들이 많다. 나는 게임을 즐겨 하는데 아직 비닐도 뜯지 못한 ‘충분히 재미있는’ 게임이 여럿 남아 있다. 새로운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사는 삶, 이제는 좀 지쳤다. 도리어 ‘좀 더’를 절제하는 순간 나는 작은 행복을 느낀다. 내 내면의 키가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했음에 기뻐한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말한다.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충분히 좋은 걸로도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내가 쫓고 있는 행복의 지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려 5년이 다 되어가는 내 스마트폰을 지긋이 바라본다. 불만이라고는 전혀 없다. 나는 지금, 충분히 좋은 상태다.    

 

배순탁 작가는 2008년부터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음악작가로, 그리고 음악 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라디오 프로그램 <배순탁의 B사이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MBC 3대 예능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모두 출연한 유일무이한 방송 작가’라고 출판사의 작가 소개란에 쓰여 있던데, 그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는 이야기죠. 영화 전문 프로그램 <방구석1열>에 자주 출연하고, 유튜브 '무비건조'에 참여 중입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 <청춘을 달리다>를 썼고, 팝 역사서 <모던 팝 스토리>를 번역했습니다. 가수 존박에게 신흥 평양냉면 집 정보를 알려줄 정도로 평양냉면을 사랑하는 그는 얼마 전 <평양냉면: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에 괜찮아져>도 펴냈습니다. 

 


글 배순탁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