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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빈 둥지를 내려다보며 (최재천 동물행동학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집을 떠났다. 공부를 해야 한다며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아들을 이젠 방학에나 겨우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는 내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를 섭섭해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그 녀석이 방학에도 무슨 중요한 할 일이 있다며 집에 못 올 것 같다고 통보해 올 것을 각오하고 있다. 이젠 내 둥지를 떠난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젠 우리 식구가 아니다. 적어도 매일 상을 마주하는 식구는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사실 이 땅의 아빠치곤 자식 기르는 일에 상당히 깊게 관여한 사람이다. 하지만 마치 내가 혼자 아들을 다 키운 것처럼 엄청나게 과장되어 알려져 있는 세상 소문에 대해 아내는 늘 온 천하에 내 더러운 비밀을 죄다 까발리겠다며 협박하며 산다. 아내가 제일 시비를 거는 문제는 내가 ‘올해의 여성운동상’이란 걸 받았다는 사실이다. 호주제를 폐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받은 상이긴 하지만 그 업보의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다.


요즘 아들이 떠나간 빈 둥지를 내려다보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둥지의 빈 공간보다 훨씬 더 큰 내 마음의 빈 공간으로 스산한 겨울바람이 분다. 얼마 전 나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라는 책을 내며 인생을 자식 기르는 번식기와 그 뒤의 반식후기로 나눠 살라고 조언한 바 있다. 자식을 기르는 기간은 누구나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자식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이 둥지를 떠나고 나면 삶의 모습 자체가 변한다고 한다.
그 책을 쓸 때에는 아들이 내 곁에 있었다. 그래서 정말 자식이 떠나간 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고 쓴 책이 아니다. 막상 아들이 둥지를 떠나고 나니 남들이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알 것 같다. 품을 알도 없는 빈 둥지에 홀로 앉아 삶을 되새기다가 불현듯 내가 얻은 결론은 뜻밖에도 은퇴였다.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에서 나는 사실 고령화에 대한 대책으로 정년을 없애자고 부르짖은 사람이다. 남들더러는 은퇴하지 말라며 정작 나는 은퇴라는 지극히 모순된 카드를 빼 든 것이다.

은퇴하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다. 공부를 제때 제대로 한 것도 아닌데 뒤늦게 얻은 마지막 기회를 운 좋게 잘 살린 덕택에 퍽 대단한 학자인 양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다.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을 해코지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물질을 받았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남을 해쳐야만 자기가 살 수 있는 줄 알고 손톱이 문드러지도록 세상을 할퀴며 산다. 은퇴하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넘쳐흐르는 내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하고 싶다.
은퇴하고 싶은 이유는 또 있다. 아내는 늘 나에게 끼가 있는 남자라고 한다. 예술은 자기가 하면서 과학 하는 날더러 예술을 했더라면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추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시인이 되겠답시고 껍죽거렸다는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대학 입시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는 홀연 미대에 가겠다는 어쭙잖은 꿈을 키우기도 했다. 어느 책에서 고백했듯이 나는 다음 생에서는 춤꾼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끼 있는 사람들 동네를 기웃거리고 싶은 사람임에 틀림없으렷다.


그러나 나는 여태 내 끼를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적어도 내 속에 끼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한 번쯤은 알아보고 싶다. 이 나이에 섣부른 ‘쉘 위 댄스’는 아니더라도 악기를 하나 배워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대금이나 퉁소에 자꾸 눈이 간다. 시조를 배워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넘치도록 많이 받은 내 행복을 남에게 나눠주는 일도 하면서 나를 위한 삶도 살아보고 싶다. 남을 위한 삶을 대놓고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작 나만을 위해 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어정쩡한 삶을 살기에는 이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개미부터 고릴라까지 ‘알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의 글로 2008년 문을 두드립니다. 문득 어느 중년의 남자가 예식장에서 딸을 사위에게 인도한 뒤 아내의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나가는 TV 광고가 떠오릅니다. 품 안의 자식이 스스로 날갯짓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어미 새와 아비 새도 접어뒀던 날개를 ‘푸드덕’거려볼 때입니다. 올해에는 매 순간 힘차고 자유롭게 날고 싶습니다. 그럼 당장 은퇴를 한다 해도 후회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