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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나의 사랑하는 소파 (안규철 미술가)

아내는 올해 내 생일 선물로 1인용 소파 하나를 들여놓았다. 가족이 모이기로 한 날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이 깜짝 선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거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골조 위에 빨간색 매트리스로 된 몸체가 S자 모양의 굴곡을 이루며 비스듬히 얹혀져 있고, 그 옆에는 책이나 찻잔 같은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자그마한 유리 탁자가 붙어 있었다.

근래에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생일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집 안에서 나를 위해 온전하게 남겨져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며 늘 불평을 해왔던 터였다. 거실에 있는 오래된 소파는 그런대로 우아하지만 크기가 작았다. 내가 그 위에 누우려면 무릎을 굽히거나, 아니면 나무로 된 팔걸이 위에 발목을 걸쳐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세로 누워 있는 것은 식구들 보기에 아름답지 않았고 나 역시 편안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편한 자리라고는 침대밖에 없는데, 침대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얼마 못 가서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뜨면 엊저녁의 아까운 여백을 잠 때문에 고스란히 날려버렸다는 낭패감에 속이 쓰렸다.

그러므로 내게 필요한 것은 여가의 즐거움을 잠의 혼수상태에 넘겨주지 않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리도록 해줄 어떤 장치였다. 아내가 들여놓은 소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앉는 것과 눕는 것 사이, 깨어 있는 상태와 잠이 든 상태 사이에서 내 몸이 균형을 잡고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에 사로잡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 부드럽고도 탄탄한 표면은 얼핏 살아 있는 동물을 연상케 했다. 나를 위해서 언제나 몸을 낮춰 대기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동물. 그 위에 몸을 눕히면 과묵하고 너그럽고 헌신적인 어떤 인격적 존재의 품에 안겨 있는 느낌이 든다. 잠시 눈을 감으면 중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는 착각을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짊어지고 다녀야 했던 몸과 마음의 구차한 무게를 자신의 몸속으로 고스란히 흡수하여 사라지게 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이 그 속에 있다.

저녁시간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이 소파에 기대어 소설을 읽는 것이 나의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안전벨트와 팔걸이가 없는 것만 빼면 비행기 1등석처럼 생긴 이 넉넉한 리클라이닝 소파는 내게서 실제로도 여행을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거기 조용히 누운 채로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북아일랜드 해변 마을(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과 터키의 이름 모를 소도시들의 황량한 시외버스 터미널(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을 정처 없이 떠돌았고, 산등성이의 붉은 수수밭(모옌의 <홍까오량 가족>)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독서용 소파에 누워서 일상 세계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는 이 마법의 여행은 나 자신을 위한 몇 가지 포상 목록에서 단연 1순위에 놓인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15도 돌리면 거실 창밖의 북한산 기슭과 북악산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온다. 스카이웨이를 따라서 별자리처럼 점점이 박혀 있는 가로등 불빛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가을밤에는 달이 북악산 능선 왼쪽에서 떠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니 집 밖에 나가 있을 때도 이 소파에서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뒹굴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어쩌다 한가한 날이면 아예 낮 시간부터 여기서 책을 보다 잠이 들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짧은 꿈속에서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사랑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의자와의 사랑.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스캔들도 없는 사랑. 불같은 열정은 없으나 그것도 지독한 사랑일 수 있다. 아내는 올해 생일 선물로 나를 놔주지 않는 새 연인을 구해주었다.


미술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원장인 안규철 님의 이야기로 2007년을 마무리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 올해에도 ‘다사다난했던’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됩니다. 어수선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올해의 기억에서 궂은일은 꺼내 버리고 사랑의 순간들만 남겨놓으면 어떨까요? 소파를 선물한 아내의 마음이 남편에게로 건너가 행복하게 꽃핀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당장 남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집니다. 우리 사회와 집 안을 사랑 가득한 증표들로 채우고 싶어지는 12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