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0월 나무와 더불어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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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나무가 가을 채비를 마쳤다. 초록이던 나무가 가을바람 사이로 울긋불긋한 빛깔을 드러낼 차례다. 숲에서도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나무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생명의 이치다.
이 계절, 도시의 나무 가운데에는 형광빛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은행나무가 단연 돋보인다. 은행잎의 노란빛은 도심을 일순 환하게 밝힌다. 이러한 은행나무의 가을 변신에는 기쁨 못지않은 걱정이 담기기도 한다. 은행잎이 떨어질 즈음에 함께 떨어지는 열매의 고약한 냄새 때문이다. 열매를 주우려고 도로에 나서는 사람들의 혼란까지 걱정의 까닭을 보탠다. 골칫거리다.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지면 조심해 걸어야 한다. 편안하던 인도는 불편해진다. 무심코 열매를 밟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은행 밟은 신발을 현관에 벗어두기라도 하면 온 집 안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신발을 씻어도 쉬이 사라지지 않
는 지독한 악취다.
은행나무는 3억 년 전에 이 땅에 자리 잡은 매우 오래된 식물이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 잡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을 일군 식물이다. 빙하기와 같은 생물 대멸종의 위기를 거치면서도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다.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에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는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다. 히로시마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비극의 장소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휩쓸어버린 인류 최악의 참극이었다. 원폭 투하 후 과학자들이 피폭 지역을 찾아 생명체가 피폭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했다. 결과는 0%였다. 소수점 아래의 그 어떤 숫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상태였다. 모든 생명이 원자폭탄의 폭격으로 완전히 소멸했다.
그 비극의 땅에서 하나의 생명이 살아났다. 은행나무였다. 줄기가 부러지고 남아 있는 줄기와 가지는 시커멓게 타버린 한 그루의 은행나무. 얼핏 봐도 죽은 나무였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되자 시커멓게 타버린 가지 끝에서 연둣빛 새싹이 터져 나왔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새잎을 틔운 은행나무는 그로부터 여태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남았다.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참극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 나무를 ‘평화의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극한의 조건을 이겨내고 이 땅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 사는 도시에서 은행나무가 참담하게 쓰러져 죽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가로수 곁에 무심코 내다놓는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한 온갖 쓰레기가 가장 큰 원인이다. 빙하기와 원자폭탄도 이겨냈지만,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에서 흘러나오는 오염원만큼은 은행나무도 이겨내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은행나무 열매의 고약한 냄새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서다. 은행나무 열매 냄새가 사방에서 퍼져 나오는 곳이라면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에서다. 빙하기나 원자폭탄까지 이겨낸 은행나무조차 살 수 없는 최악의 환경에서라면 사람도 살 수 없다. 고약하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며칠 동안이
다. 꽃 피고 열매 맺는 나무라는 생명의 이치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여유는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어줄 지혜가 될 것이다.
2백50여 년 전 이 땅의 선비 홍대용은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지구를 살아 있는 활물活物이라 하고 모든 생명은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그는 이어서 “인간은 지구의 생명력을 좀먹는 벼룩과 같은 해충에 불과하다”는 독설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의 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도 명저 <생명이란 무
엇인가>에서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전제하고, “성장하는 모든 개체군은 생물권의 기능에 통합되지 않으면 멸종의 길을 걷게 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멸종의 길을 걸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이다. 은행나무의 고약한 냄새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분명 원자폭탄도 이겨낸 은행나무가 처참히 죽어가는 세상보다 나은 세상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 짚어 봐야 할 가을이다.
한결 선선해진 바람과 함께 나무들도 갖가지 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풍에 홀려 위만 바라보며 걷다가는 낭패를 당할지 모릅니다. ‘냄새 지뢰’ 은행나무 열매가 길거리 곳곳에 떨어져 있으니까요! 지난 20년 동안 이 땅의 크고 오래된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향기를 글과 사진으로 전해온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은 은행의 고약한 냄새에서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고,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는 공익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의 이사이며, 인하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나무가 말하였네> <천리포수목원의 사계> <슈베르트와 나무>등 나무 관련한 책 여러 권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