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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미술가 지나 손 "아름답고, 혼란하고, 고요한 지구의 시간을 지나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 生"
대지를 드로잉하는 현대미술가 지나 손. 갤러리 안팎을 넘나들며 기존 질서, 관습, 터부, 상식이라는 것에 어퍼컷을 날리는 지나 손. 그는 자신의 대지 미술을 통해 사람들이 세상을 비틀어보고 새롭게 보기를, 그렇게 자신의 예술이 ‘아삭거리는 당근’이 되기를 꿈꾼다.

대지 미술에 기반을 둔 현대미술가 지나 손은 1965년 안면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베르사유 시립미술대학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했다. 프로젝트 주제에 따라 설치, 사진, 영상, 회화, 판화, 조각,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대지 미술을 전개한다. 런던·파리·독일·한국 등에서 열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6월 자하미술관에서 개인전 <인왕목욕도>를 개최했다.
우주에서 신이 바라보려면 초고도 현미경쯤이 필요한 초미립자 같은 인간 세상을 왜 인간까지 초고도 현미경으로 바라보려 애쓰는가. 지구 생태계의 막내로 태어난 인간은 왜 자연에 대한 숭배를 지배로 바꾸려 하는가. 인간의 오만불손한 만행을 대지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거부권으로 써 내려가는 사람이 대지 미술가다. 지나 손, 그는 한국에 몇 없는 대지 미술가다. 빛의 움직임, 생성과 소멸, 순환의 원리를 지켜보면서 최소한의 개입만 하는 개념 작업을 대지에 부려놓는다. 세상 안쪽에 도사린 비밀스러운 자연을 들여다보고, 우주의 적막에 주파수를 맞추며, 지구자기장에 접속하면서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에도 새싹이 돋고 생명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그가 바다에, 인왕산 기슭에, 밀밭에 부려놓은 아득한 신화의 세계. 그 생명의 원형 속으로.


서해안에 1천 개의 튜브를 기하학 형태로 띄운 후 물이 들어오면서 그 형태가 깨지는 과정을 지켜본 ‘PLAY BUOY’. 팬데믹 시대 인류의 저항을 다룬 국제 프로젝트로 국내외 작가와 일반인 1천 명이 참여했다. 태안 안면도, 2021.

20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 뒤늦게 작가가 됐다고요?
열아홉 살에 고향 안면도를 떠나왔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섬마을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할 상황이 되지 않았죠. 어떻게든 그 섬을 탈출하는 게 목표였고, 여건에 맞춰 진학하고, 신문사에 입사하고, 20년을 기자로 살았어요. 한데 지금 생각해보니 현대미술에 대한 공부는 그 20년 동안 다 한 것 같아요. 아침에 출근하면 전세계 뉴스를 챙겨 보는 직업이었으니까요. 백남준 선생도 아침이면 가판대에서 신문과 잡지를 한 뭉텅이 가져와 오후 3시까지 읽으셨다잖아요. 현대미술가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 연습을 나는 20년 동안 했나 봐요.

그러던 어느 날 출근했는데, 자리에 앉기가 싫은 거예요. 더 이상 미루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졌어요. 부장 보직까지 맡은 시기였고,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엄마 시골 갈 건데 따라갈래?” “좋아!” 이 두 마디 끝에 안면도로 다시 내려갔죠. 그길로 카메라를 들고 15일 동안 섬을 일주하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필연이었는지 카메라에 담긴 건 섬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바다 쓰레기 같은 사물이었어요. 분명히 이 사물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가장 많이 발견한 게 부표인데, 그건 어부가 바다 농사를 짓기 위해 표식으로 띄우는 ‘바다로 통하는 문’ 같은 거예요. 그게 물살로 인해 줄이 끊겨 흘러 다니는데, 표류하는 것, 유목적인 것이 현대인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때부터 바다에서 온 사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제 이야기가 시작인데, 50부작 대하드라마처럼 숨 가쁩니다.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갔다던데,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2017년이었고, 쉰두 살 때였어요. 2014년 런던에서 첫 전시를 개최한 후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일곱 번 열었는데, 언젠가부터 현대미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어요. 베르사유 시립미술대학 (Ecoles des Beaux-Arts de Versailles) 2학년으로 편입해 고독한 파리 시절을 거쳤죠(2019년 8월, 당시 파리 생활과 파리에서 연 개인전 <누군가로부터> 소식을 <행복>에 기사로 알렸다). 2학년 때 독일 요제프 보이스 마을의 악톨Artoll 전시에 선발돼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죠. 하나의 주제를 향해 사진, 설치, 영상, 페인팅, 퍼포먼스 등 여러 매체를 총 동원하는 방식은 파리 시절부터 시작했어요. 18점(20점 만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고 졸업하면서 “파리에 남아 좋은 작업하라”는 교장 선생님 전화까지 받았는데, 팬데믹 시기에 나이 든 외국인이 어떻게 견디랴 싶어 귀국했죠.


기와를 해변에 ㄷ자로 설치하고 파도가 기와를 흔들어 ‘자연이 드로잉하는’ 장면을 관찰했다. 태안 안면도, 2021.
대지 미술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가요?
섬사람은 바람이 먼저 들어오면 물 들어오는 시간이구나 알아채고, 구름 색깔만 봐도 비가 오겠구나 짐작하죠. 섬에서 나고 자란 내게 바다는 우주이고 영감의 재료에요. 내 삶의 토대를 작업의 줄기로 쑥 뽑아내고, 그걸로 졸업 작품을 하고 싶어서 2019년 잠깐 귀국했어요. 해변에 부표 수백 개를 사각형으로 설치해놓고 바닷물에 따라 형태가 깨지는 모습을 촬영하고, 퍼포먼스·페인팅·판화 등과 연결해 ‘질서-무질서’로 완성했죠. 그 작품으로 보자르 수석 졸업이라는 영예를 안았어요.

이후에 선보인 대지 미술도 흥미롭습니다. 염소와 함께한 개념 드로잉까지 있더군요.
바다에 집 한 채 분량의 조선 시대 기와를 ㄷ자로 배열하고, 파도가 기와를 흔들게 뒀어요. 파도가 끌어낸 드로잉은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죠. 낙동강 변에서 연막탄을 손에 쥔 사람들이 바람에 연기를 날려보내는 ‘허공을 드로잉하다_연기’ 퍼포먼스도 했고요. 지구촌 작가들의 드로잉을 그려 넣은 튜브 1천 개를 서해안에 띄운 ‘Play Buoy’도 시도했죠. ‘염소와 함께 드로잉’은 금동이라고 이름 붙인 어린 염소를 붙들고 종이 위에서 드로잉하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이고, 어디론가 이동시키는 퍼포먼스였어요. ‘염소가 내 작업을 이해할까’라는 주제로 염소와 함께 드로잉하는 개념 작업이었죠.

“동양적 대지 미술의 원형은 어쩌면 풍수일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던데요.
조선 시대 불화를 계승한 마지막 화승 병진 스님이 “그냥 자네가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하시며 제게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책을 선물하셨어요. 그걸 살펴보니 선조들의 기와집도 ㄷ자, 후손까지 두루 살피는 좋은 묫자리(명당)도 ㄷ자, 사람과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도 ㄷ자, 어머니의 자궁 모양도 ㄷ자더군요. 서양에선 1960~1970년부터 대지 미술이 시작됐는데, 우리는 용어만 쓰지 않았을 뿐 이미 예전부터 대지에 예술적 행위를 해온 거죠. 그 ㄷ자에서 내 형태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요.


<인왕목욕도> 중 지름 5m의 조형물 ‘여름에 피는 색’, 2023. 미술관 옆 인왕산에 설치한 작품으로, 1년 이상 숲에 놔두면서 햇볕과 바람·비·눈을 맞으며 자연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6월 1일부터 11일까지 자하미술관에서 연 개인전 <인왕목욕도>는 전시장 안팎을 넘나드는 대지 미술이었잖아요.
인왕산 중턱 자하미술관 옆에 큰 숲이 있는데, 그중 3천여 평을 캔버스로 삼았죠. 먼저 ‘여름에 피는 색’은 지름 5m의 천 조형물이에요. 광장시장을 다니며 얻은 자투리 헝겊을 감아서 땅에 식물처럼 심었죠. 1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이 ‘여름에 피는 색’은 내 가슴에 몹쓸 꽃이 피고, 그 자리에 고통이 고이다가 다시 생명의 꽃을 피우는 시간 같았죠. 그 둥근 형태가 내 세포 같았거든요. 이 작품의 첫 번째 관람객은 멧돼지였어요. 기껏 만들어놓은 걸 헤집어놓은 게 아름다워서 박수를 쳤어요. 보통 대지 미술은 전시나 퍼포먼스 후 해체하는데, 이 작품은 1년 이상 두면서 햇빛이 내려앉고, 멧돼지가 헤집고, 돼지감자 싹이 올라오는 것처럼 자연이 개입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에요.

전시 두 달 전 산불이 난 서쪽 숲에 황금색 욕조를 놓은 ‘황금연못’이란 작품도 있어요. 암 투병 중 나를 정화해준 목욕시간처럼 산불을 흡수한 땅이 새 생명을 밀어 올릴 거라는 신화적 암시를 새겨 넣었죠. 미술관 내부에는 ‘허공을 그리다’ 연작을 전시했어요. 사인까지 했으니 분명 완성품인데, 캔버스가 비어 있는 작품이죠. 인왕산 숲에 5백 호짜리 캔버스를 놓아두거나 좀 작은 캔버스를 나무에 매단 ‘인왕상상도’도 있어요. 바람, 햇빛, 밤에 다녀간 멧돼지 흔적까지 담은 후 완성될 작품이죠. 이렇게 갤러리 안팎을 드나들며 기존 질서와 관습, 신념에 의문을 던지는 작업이에요.

8월호 표지 작품 ‘해바라기’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파리에 있을 때 3색 막대기를 들고 다녔어요. 철물점에서 파는 흔한 물건인데, 같은 크기로 대량 복제한 이 막대기안에 모든 미술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죠. 여기에 동양의 색인 빨강·노랑·파랑을 칠해 벽에 기대어놓기도, 던지기도 했죠. 연결부가 호스라 여러 개 세워두면 해바라기처럼 고개가 구부러지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웠어요. 나중에 이 막대기를 1천 개쯤 만들어서 밭이든 바닷가든 꽂으면 그대로 해바라기밭이 되겠죠?

대지 미술로 결국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내 작업은 ‘자연의 맥동脈動으로 인해 나의 의지가 해체되거나 변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어요. 내가 애써서 자연 속에 기하학 오브제를 펼치지만, 파도나 바람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이 되어버리죠. 그런데 내 의지보다는 자연이 개입해 만들어낸 우연이 더 아름답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한때 아름다웠고, 혼란했고, 고요하던 시간을 지나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 생이라는 걸 관람객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또한 내 작업이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이끄는 통로가 되길 바라죠. 예술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당신이 참여하는 자체가 현대미술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사진 제공 지나 손

글 최혜경 기자 | 인물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