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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성호 바벨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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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책 그림 같은가? 꼼꼼히 뜯어보라. 사실 세상에 없는 풍경이다. 책장 선반인 줄 알았더니 서양 책의 책등이고, 그 사이에 꽂힌 책들은 민화의 책가도 부분을 끼워 넣은 것이다. 책 제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이다. 사실적인 것 같지만 추상적인 김성호의 회화.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 그림엔, 실은 숨은 서랍이 여러 개다.
서양 책과 우리 민화의 책가도, ‘레트로’와 ‘유토피아’가 화면에 함께 자리한 ‘레트로토피아’ 시리즈. 이를 중심으로 한 김성호 작가의 개인전이 3월 25일까지 서울 이태원의 박여숙화랑에서 열렸다. ‘Volume Tower-Retrotopia’, oil on canvas, 120×120cm, 2021.
김성호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8년 개인전 <미役事力士술>을 시작으로,(갤러리현대, 2009),(갤러리현대, 2010), (갤러리현대, 2014), (박수 근미술관·갤러리현대, 2017)를 열었습니다. 3월 25일까지 박 여숙화랑에서 <그림으로 그림의 존재를 묻다>를 열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과거를 들여다보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4차원 공간 속 그 서재는 호르헤 보르헤스(나도, 당신도 앙모하는 그 작가)의 <바벨의 도서관>을 오마주한 것이다. 미로로 이루어진 바벨의 도서관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책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책까지 모두 있다. 그리고 도서관 어딘가에 나머지 모든 책을 해석할 수 있는 완전한 책이 감춰져 있다. 그 완벽한 한 권은 바로 신神이다. 인간은 그 우주에서 완전한 책(신)을 찾아 이 책 저 책을 옮겨가며 방황하는 불완전한 사서들이다. 그리고 종내 충족되지 않는 지식에 발버둥치다 죽게 된다. 에두른 것 같지만, 화가 김성호의 그림을 말하다 보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오는 이야기다.
계속 책을 그렸나?
대학 졸업 후 내 그림이 가야 할 길을 찾아다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원히 헤매는 불완전한 사서들에 영감을 받아 책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책장의 책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다음엔 책을 확대해 나를 짓누르는 권위, 구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미役事力士술’ 시리즈). 거대 담론 말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장난감, 포스트잇, 서류 뭉치 등도 화면에 등장시켰다(‘볼륨 타워’ 시리즈). 책의 색깔을 없애고 형태와 구조만으로 켜켜이 쌓은 고원 같은 세상도 만들어봤다(‘테이블랜드’ 시리즈). 뭔가 초월적 존재, 존재하지만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것을 넣고싶어서 책을 뒤덮은 식물 넝쿨도 한참 그렸다(‘Mirage’ 시리즈). 그 사이사이 더 많은 시리즈가 있는데, 그래도 계속 책만 그렸다. 왜 책만 그리느냐고? 책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초기 작품에선 책등에 실재하는 책 제목이 낱낱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제목이 사라지거나 세상에 없는 제목이 등장했다.
실제 책 제목을 넣으니 보는 이가 그 책의 의미 속에 갇혀 버렸다. 읽은 책이면 그 내용에 함몰되고, 읽지 않은 책이면 제목에 갇혔다. 나는 그저 맥락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볼륨 타워’ 시리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책과 이미 존재하는 책을 함께 그렸다. 진짜와 가짜가 혼재하는 세상이다. 일견 <바벨의 도서관> 같다. ‘테이블랜드’ 시리즈에서는 책등을 지우고 회색조로 책이 쌓인 구조만 집중했다.
그는 신중하고 작품은 심오하며 애석하게도 그의 대화 속도는 과속에 가깝다. 그래서 2010년 개인전 <볼륨 타워> 도록에 쓴 작가 노트를 대신 끌어놓는다. “거대한 책, 거대한 책들 속을 헤매는 꿈을 꿨다. 마치 지독한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고 한걸음도 나아가기 힘들었다. 삶의 지표가 된다고 생각했던 책이 미로처럼 끝도 없이 쌓여 나의 앞을 가로막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내가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중략) 언젠가부터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나름의 진리 속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책에 존재하기 마련인 제목을 지우고 책의 색깔도 지웠다. 구조와 형태미를 생각하며 쌓듯이 그렸다. 그랬더니 이름처럼 고원 같은 형상이 탄생했다. ‘Tableland’, oil on canvas, 240×486.6cm, 2014.
그럼 <행복> 4월호 표지작 ‘레트로토피아’ 이야기를 해보자. 책등에 제목이 다시 등장했다.
사실 그 책 제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각 세기별로 출현한 개념, 철학적 담론, 과학적 발견 등을 살피고 내가 가상으로 책 제목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만들어진 진실’쯤 될까.
‘레트로토피아’에선 책가도가 새롭게 출현했다.
서양의 양장본 책등을 확대해 책장처럼 그려 넣고, 그 안에 축소한 책가도를 놓았다. 실재하는 책거리 그림을 거의 그 모양 그대로 그려 넣었다. 강렬한 원색의 서양 책은 배경이 되어주고, 화면을 통제한다. 보는 이의 눈이 원색의 향연에 익숙해지면 책가도의 조형미, 가름끈의 장식성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책은 눈물이 없다. 이 책은 하품 나는 잠언만 가득하다.
이 책은 눈 밝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빛이 있다…. 대개 책등과 책 표지에선 이런 ‘소리’가 흘러나온다. 몸이 사람의 정신을 어느 정도 대변하듯 책의 얼굴은 책 안에 담긴 말들을 대변하는 법이므로. 그러나 김성호의 그림 ‘레트로토피아’에선 그 소리가 묘연하다. 책에 담긴 의미를 부러 지워낸다. 대신 책 크기, 표지 색깔, 글자 형태 등 표면과 외양만 조형적 질서에 따라 배치한다.
책가도와 레트로라니, 게다가 유토피아라니.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레트로토피아>에 공감했다. 인류는 투쟁을 통해 무언가를 계속 이룩하면서 현재까지 왔는데, 그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다. 희열을 느끼던 순간, 극복의 순간으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국뽕 신드롬, 트럼프식 우파 포퓔리슴, 인종차별 등이 모두 회고·회귀·레트로 같은 키워드와 연결되지 않나. 바우만이 또 말하길, 사람들의 실망이 반복되다 보니 거대 담론이 아닌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던 와중에 민화, 특히 책거리 그림을 많이 보게 됐다. 사실 민화야말로 소망, 욕망을 담은 그림 아닌가. 부귀, 장수, 다산, 출세 같은 것 말이다. 책가도 속 책도 지식을 지니길 바라는 욕망의 발현일 테고.
‘Volume tower-Retrotopia’, oil on canvas, 193.9×112.1cm, 2021
‘레트로토피아’ 시리즈는 전작과 비교해도 단연코 색의 향연이다. 그리고 명암법과 원근법이 거의 사라졌다.
내 그림은 화면에 직선이 많이 들어가므로 일견 차가워 보인다. 색이 그걸 와해하는 역할을 한다. 또 색과 구조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명암법과 원근법도 많이 쓰지 않았다. 전통 회화에서 ‘현실의 모방’ ‘재현’ 도구로 쓰던 명암법과 원근법을 줄였다. 깊이를 걷어내는 방법이다. 대신 색채와 형태, 구조가 보이길 바랐다. 여기서 평론가들은 사실과 허구라는 개념을 집어내더라. 또 있다. 세기를 관통했을 ‘법한’ 거대 담론을 암시하는 ‘가짜’ 책 제목이 서양 책의 등에, 그 사이에는 세속적이고 개인적 소망을 담은 ‘진짜’ 책거리 그림이 들어앉아 있다. 그런데 나는 가짜와 진짜, 재현과 환영의 대립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이 가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것들이 부딪치고 섞여 있는 게 세상 아닌가.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내 그림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재현 회화와 환영 회화의 속성을 모두 지녔다”라고 풀이한다. 책은 본래 껍데기를 통해 끊임없이 발설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책이 품음직한 암시, 묘사, 상징을 걷어낸다. 책의 표면만 담담하게 그려간다. 역설적이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만들어진 것과 원래 그대로의 것, 재현과 환영을 뒤섞는다. 다시,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를 해야겠다. 불완전한 사서들처럼 그는 책 그림으로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완벽한 책을 찾아 방황하듯 ‘완벽한 그림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시각예술은 무엇인가’ 고심한다. 이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게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묻는 질문과 다르지 않을 터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