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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김홍석 질문하는 미술, 번역하는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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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형물을 만들고, 어떤 미술가는 영상을 찍거나 퍼포먼스를 벌인다. 김홍석 작가는 번역을 한다. 사회와 문화 속에서 단어를 발굴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번역한 뒤, 이를 무수한 형태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조형부터 회화, 사진, 영상, 퍼포먼스까지 전방위적으로 전개되는 그의 작업은 관념을 전복하며 현실을 재조명해 끝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풍선 형태의 조각 3부작은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행위에서 시작해 개개인의 호흡을 수집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중략) 이 풍선 작품은 나의 가족의 초상이며, 숨의 기억이다.” _김홍석
청설모가 뛰노는 경기도 소도시의 한갓진 주택가. 크고 작은 연립주택 사이에 한 미술가의 작업실이 깃들여 있다. 층고가 높은 1층에는 의뭉스러운 돌덩이와 막 물감 한 겹을 쌓은 그림, 팔다리가 달린 스티로폼 조각이 널려 있고, 아담한 2층 방에는 공포스러울 만큼 실제 사람 같은 조형물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진 캐비닛과 검은 비닐 뭉치가 뒤섞인 3층의 휴식 공간 역시 기묘하기는 마찬가지. 완성일까, 미완성일까? 작품일까, 아닐까? 마음 놓을 곳을 찾지 못한 객은 닫힌 공간 안에서도 길을 잃는다. 답하는 이 없는 질문. 그저 끝없이 의심하게 하고 사유하게 하는 질문. 김홍석 작가의 공간은 결코 무던하지 않다. 마치 40년 가까이 고수해온 그의 작품 세계가 그러하듯이.
그간 김홍석 작가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익숙했다.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종종 혼란에 빠트렸고, 때론 도발적 퍼포먼스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재기발랄하지만 냉소적이며, 변화구처럼 느리지만 날카로운 화두를 던진다.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 협업, 번역과 차용, 미완성과 완성의 경계를 허문 작품.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서 성행해온 문화 번역과 현대미술의 장막 뒤에 숨은 윤리적 문제를 비꼬며 영상, 퍼포먼스, 사진, 회화,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펼쳐왔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묶이지 않는 김홍석만의 미술은 캔버스에 점 하나만 찍어도 작품이 되는 이 시대, 미술을 미술이라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린 김홍석 작가의 개인전 <작은 사람들>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번역과 차용의 유희
그의 작품은 부단히 ‘개념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와 개인의 일상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며 일상의 이면을 뒤집고, 현실적 문제를 비틀어 꼬집는다. 이를테면 토끼 인형 옷을 입은 사람 형태의 조형물을 눕혀놓고 “시간당 5천 원을 받는 북한 출신 노동자가 연기 중”이라는 거짓 안내문을 적어놓는다든지(‘이것은 토끼입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가짜 인터뷰(자막도 가짜인)를 ‘동티모르 노동자의 인권에 관한 인터뷰’ 영상으로 전시장에 설치하는 식(‘The Talk’)이다. 그럴싸한 픽션을 만들어 수시로 관객의 뒤통수를 치며 현실의 여러 윤리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기술. 그의 미술이 어려운 듯 쉽고, 가벼운 듯 묵직한 이유다.
“1980년대 말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무렵 독일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 교수들에게 한국성(Koreanness)에 관한 질문을 직접 받으며 내가 왜 미술을 하게 됐는지, 한국성이란 무엇인지, 과연 미술의 역할은 무엇인지, 이런 고민을 처음으로 하게 됐지요. 미술이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할 때 나도 그 한 축을 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그는 활동 초기부터 한국성에 집중했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적 모더니티를 공부하게 됐고, 후기식민주의를 공부하게 됐으며, 결국 후기구조주의까지 파고들었다고 한다. 점차 원류로 향해 나가는 길, 그 길 끝에서 지금 실존하는 사회와 만났다. “남들이 하는 현실 참여가 아닌, 나만의 현실 참여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내가 재미있었던 건 현실 참여 자체가 아니라 그 미학적 측면과 한국성, 나만의 미술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그의 오랜 주제인 ‘번역’에 관한 화두도 한국의 근대성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자신의 작업이나 작품에 대해 글을 쓰고 영어로 번역하다 보니 창작물과 번역물의 관계, 국가 간 문화 번역 문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인 서양의 역사와 철학, 경제 시스템 등은 몇 번의 번역 단계를 거쳐 들어왔어요. 특히 일본을 통한 것이 많죠. 그래서 우리나라 용어가 어렵고 복잡해진 거고요. 보통은 원본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나는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친 번역이 결과적으로 원본과 다르더라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오역이 열어주는 가능성. 이후 그는 사회 속에서 발견한 소재를 차용, 변형해 자신만의 ‘번역본’을 완성한 뒤 이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영상과 퍼포먼스로 재현했다.
때로는 인권에 대해, 때로는 저작권에 대해 다뤘다.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고 무용가와 협업하거나(‘미스터 킴’), 존 F 케네디의 연설을 광주의 초등학생에게 읽게 하는(‘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등 미술가의 윤리적 문제를 파고든 작품도 적지 않았다. “1980~1990년대의 많은 작가가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일반인을 인터뷰하거나 다큐멘터리 같은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 과정에서 폭력성을 느꼈어요. 미술가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이용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실제 사람들의 현실은 미술을 통해 크게 개선되지 않는 데 비해 미술가의 명성은 널리 떨치니까요. 그런 윤리적 측면에 접근한게 2013년 전시인 <좋은 노동 나쁜 미술>이에요.”
주방이 딸린 작업실 3층은 김홍석 작가의 휴식 공간으로 꾸몄다.
작업실 2층의 아담한 방에는 그의 작품들이 인형 탈을 쓴 실제 사람처럼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온갖 재료와 작품이 뒤섞인 1층의 메인 작업 공간. 완성과 미완성을 가늠하기 어렵다.
개인의 초상, 숨의 기억
김홍석 작가는 이른바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미술에 별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 영역은 자신만의 미술, 관심 대상은 오직 자신과 관련한 사람들이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미술이라고 하잖아요. 그 수많은 대상을 내가 ‘어떻게 기준화하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그게 바로 전문 직업으로서 미술이죠.” 그가 최근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선보인 풍선 조각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풍선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듯한 조각 작품들(‘MATERIAL’ ‘Breaths’ ‘Untitled(Short People)’). 신랄한 조롱이나 냉소적 유머와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시리즈의 모티프는 ‘사람의 숨’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과거엔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 것을 점점 용서하게 돼요. 가뜩이나 비밀이 없어진 시대에 나이까지 먹으니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요. 흥분도, 호기심도 없어졌죠. 그래서인지 예전과 달리 일상을 좀 더 안쪽까지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미술을 통해 환희나 행복, 위안을 얻는 행위도 무척 싫어했는데,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다는 게 나름 중요할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가족에게, 지인에게, 공장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각자의 소망을 담아 풍선을 불도록 부탁했고, 그렇게 숨을 채운 풍선들을 공장으로 보내 브론즈나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재료로 다시 제작했다. “우리의 숨결 하나하나에 대한 의미 부여는 우리끼리나 가능한 거죠. 다른 사람에겐 정말 관심 밖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우리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가 커지면 국가가 되잖아요. 그렇게 모여 사는 것이 인간 사회니까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아요. 무언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냥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자 싶었지요.” 이번 전시 제목은 <작은 사람들>. 그에게 작은 사람이란 말 그대로 ‘short people’, 숨으로서 대체된 ‘우리’다.
<작은 사람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최근 작업한 ‘인간질서’ 연작. 김홍석 작가는 미완성으로 치부될 만한 상태를 완성이라 주장하며 관객 앞에 꺼내 보였다. 롤러질 몇 번하고 만 캔버스들이 전시장 곳곳을 메웠다. “우리에겐 너무나 오랫동안 박혀 있는 관념이란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 관념을 우리 눈으로 본 적은 없죠. 사실 관념은 타인의 것인데, 그렇게 타인에 의해 종속된 나의 인식이 너무 나강력해 그걸 바꿀 마음도 없고요. 그런 요소가 너무 많아요. 인간의 인식에 대한 시스템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미술이라고 하니 미술인지 알겠으나 미술 작품 같지 않은 작품. 완성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미완성 같은 작품. 김홍석 작가는 앞으로도 ‘인간질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할 계획이다. 끝없이 사유하고 자문하며 현실을 비추는 그의 작업은 비록 대중에게 희망이나 위로를 주지 않더라도 미술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의미를 충분히 상기시킨다. 수많은 합의와 투쟁, 충돌과 균열 속에서 담론을 끌어내는 것, 이것이 또한 김홍석 작가만의 미술일 터이다.
김홍석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현재 상명대학교 무대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2009년 리옹 비엔날레, 2012년 광주 비엔날레 등 다수의 비엔날레 및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