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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보희 자연으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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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화폭을 빈틈없이 채우는 건 작가의 지극한 손길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 들끓는 온갖 기호나 장치 하나 없이 그저 묵묵히 캔버스 위로 쌓아 올린 물감과 시간의 켜. 김보희 작가가 그려낸 자연은 그렇게 보는 이를 압도한다. 강렬한 생명력과 깊은 온기로 오늘의 우리를 위무한다.
김보희 작가의 작업실은 집의 일부다. 그에게 작업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그는 매일 일어나 밥을 먹고 산책하고 잠을 자듯 이곳에 올라와 그림을 그린다. 묵묵히 성실하게 이 안에서 자신만의 평화를 쌓아간다.
김보희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와 대학원 순수미술과를 졸업하고, 2017년까지 모교의 동양화 전공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재료 사용과 화면 구성을 통해 독창적 풍경 회화를 선보여왔습니다.
‘Jungmoon 1911B’, color on canvas, 162×130cm, 2019
7월의 어느 주말, 한적하던 삼청동 길가에 긴 줄이 늘어섰다. 오전부터 몰린 인파는 뜨거운 햇볕 아래 점점 더 불어났고, 중간중간 줄 서기를 포기한 채 돌아선 이도 적지 않았다.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김보희 작가의 개인전 를 보기 위한 행렬이었다. 연일 SNS를 통해 전시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는 동안, 몇 번이나 새로 찍은 포스터와 도록은 모두 품절됐단다. 굳이 코로나19 시대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생존하는 국내 작가의 개인전에 이토록 관람객이 몰리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 대체 무엇이 그리 긴 시간 불볕 아래 줄을 서면서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전시장을 찾게 만드는 걸까? 공간마다 밀도 높게 들어찬 초록의 향연, 푸른 바다와 싱그러운 수목이 넘실대는 그의 캔버스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시간을 선물하고 있는 걸까?
제주로 간 화가
김보희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제주가 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이었다. 실제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천이 바로 제주의 자연. 동양화 기반의 구상 풍경 회화를 그리는 그는 오랜 시간 제주 풍광을 주목해왔는데,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기 시작한 뒤론 화폭 위 색감이며 형태가 한결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2017년, 이화여대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그는 완전히 제주에 정착했다. 그러니까 최근 금호미술관에서 선보인 신작들은 그 3년간의 기록인 셈이다. 제주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했다. 시야로 푸른빛이 겹겹이 포개지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 길가에선 보이지 않는 수풀 안쪽에 김보희 작가 부부의 집이 깃들여 있었다. 제주 바다처럼 푸근한 남편과 오동나무 꽃처럼 다정한 아내가 붉은 벽돌집 앞에서 손님을 맞았다.
사실 김보희 작가가 제주를 마음에 품은 건 신혼여행지로 이곳을 선택하면서부터다. 이후 결혼기념일마다 남편과 제주를 여행하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 말년엔 여기 내려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고 한다. 그 무렵 눈에 들어온 건 삼나무 숲과 돌담, 오솔길로 둘러싸인 너른 귤밭. 부부는 “영화 <해바라기> 속 소피아 로렌이 뛰어올 것만 같던” 그 시골길의 정취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아예 정착한 건 3년 전이지만 실제로 여기 산 지는 17년쯤 됐어요. 일찌감치 땅만 사두고 집은 정년퇴직 후 지으려 했는데, 남편이 좀 더 일찍 회사를 그만두면서 먼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보니까 나도 자꾸 여기 내려와 작업하게 되더라고요. 작업실이 크니 큰 작업을 하기 좋아서요.”
‘In Between’, color on canvas, 400×400cm, 2019
김보희 작가의 집은 말 그대로 ‘작업을 위한’ 집 같았다. 작업실이 자리한 2층의 층고가 유난히 높아 바깥에서 건물 외관만 보면 삼층집이나 다름없었다. “작업실이 커지면 작품도 커진다”는 얘기를 과거 어느 조각가에게 들었는데, 그 말이 과연 맞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Days’. 100호 캔버스 스물일곱개를 이어 붙인 이 거대한 초록빛 풍경은 그가 틈만 나면 제주에 내려와 하루씩 이틀씩 그려가며 2년 반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사실 동양화 전공자인 그가 한지에서 캔버스로 재료를 바꾼 것도 애초에 큰 작업을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종이는 작품 크기를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지만, 관리 역시 무척 까다롭다. 대신 그가 고수한 것은 동양화 물감. 캔버스 천에 동양화 물감을 제대로 쌓기 위해, 또 종이 채색의 맛을 살리기 위해 수없이 연습하고 또 실험했단다.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종이에 그리든 캔버스에 그리든, 동양화가 됐든 서양화가 됐든, 내가 ‘무얼 대상으로 어떤 걸 추구하면서 그리느냐’가 가장 중요하지요.”
‘The Terrace’, color on canvas, 324×520cm, 2019
자연 그리고 일상
제주로 내려간 뒤 달라진 건 작업 방식만이 아니다. “예전 작품엔 바다나 돌담 풍경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곳에 정착하고 나서는 초록색 그림을 유독 많이 그리게 됐지요.” 사실 남편이 애지중지 가꿔온 집 앞 정원을 한 바퀴만 돌아도 그가 초록색에 ‘꽂힌’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수한 식물이 한데 뒤엉킨 채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쑥쑥 자라난 정원은 그의 그림 속 짙은 초록빛 그 자체였다. 이들 부부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공간 역시 정원을 앞에 둔 1층의 거실 겸 주방. 전면 유리창 너머 펼쳐진 풍경이 어쩐지 낯익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개인전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The Terrace’의 풍경이다. “우리 부부가 ‘즐기는’ 공간이에요. 차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레오(부부의 반려견이자 종종 작품에 등장하는 검은 래브라도 레트리버)도 항상 같이 있고요. 그렇게 노상 앉아 있는 곳인데, 눈앞의 풍경이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그 다양한 시점을 산수화처럼 하나의 화폭에 담은 거예요.”
그가 그리는 풍경은 섬세하게 재현한 원형 그대로의 자연이지만, 작가의 경험과 상상으로 덧칠한 또 하나의 자연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이 묘한 판타지적 여운을 남기는 건 아마 그 때문일 터. 실제 ‘The Days’만 해도 제주의 자연과 호주나 피지섬 같은 남쪽 나라를 여행하며 마주한 자연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좋아하는 풍경을 그리지만 그 안에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뺀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작품 안에 담아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 그림 안엔 내가 무서워하지 않는 동물들만 살아요. 도마뱀이나 개구리, 새, 원숭이 정도죠. 사실 원숭이는 어떻게 보면 남편이나 나를 대신해 그린 것일 수도 있어요. 사람은 자연을 훼손하고, 시기 질투로 서로 물어뜯고 싸우니까 그리기 싫거든요. 다른 동물은 배고픈 상태가 아니면 남을 죽이지 않잖아요. 자연스럽게 자연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죠.”
집을 에워싼 넓은 정원에는 부부가 좋아하는 식물이 다양하게 뒤섞여 있다. 반려견 레오와 함께하는 정원 산책은 이 부부에게 결코 빠질 수 없는 일과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풍경.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에 김보희 작가의 작품이 어우러져 공간에 깊이감을 더한다.
그가 가장 최근에 그린 작품은 ‘Jungmoon’ 시리즈. 야자수 사이로 짙게 번지는 노을이며 헤드라이트를 켠 채 달리는 자동차들이 그간의 작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그 역시 정원이나 바다와 마찬가지로 지금 작가의 눈에 자꾸만 담기는 풍경이다. “개인전을 연 뒤 내가 우리 집을 참 많이 그렸구나 싶었어요. 내 생활이 그대로 그림에 나오더라고요. ‘Jungmoon’ 시리즈도 마찬가지예요. 개를 데리고 중문에 자주 산책하러 가거든요. 그러면서 노을 지는 풍경이나 자동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인생에서 스쳐가는 것들을 떠올리기도 했고요.” 사실 시간의 흐름이란 김보희 작가의 작품을 읽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다. 꽃의 씨앗과 만개한 꽃, 시든 꽃을 하나의 화면에 포갠 작품 제목이 ‘Self Portrait’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씨앗이나 열매에서 마주하는 건 강렬하게 응축된 생명력. 이를테면 이 달 <행복>의 표지작인 ‘Towards’는 그가 파파야 열매를 보며 느낀 ‘힘’을 표현한 작품이다. “제주의 여미지식물원에서 발견한 파파야예요. 이 열매에서 굉장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느꼈거든요. 당시에 내가 기운이 좀 없었나 봐요.
그래서 이런 데서 힘을 얻고 싶었던 거죠.”
화가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40년, 이미 그에게 작업이란 일상과 다름없다. “내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요. 어느 정도 정해놓은 방식에 따라 규칙적으로 사는 걸 좋아해요. 일어나 둘이서 아침을 먹으면 커피 한 잔씩 들고 레오랑 마당 한 바퀴 돌고, 그런 뒤 세수하고 각자 일터로 향하죠. 나는 작업실로, 남편은 마당으로.” 사실 그가 그린 제주 풍광을 감상하다 보면 그가 제주에서 어떤 삶을 보내고 있는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다. 꽃과 나무와 온갖 열매, 그 푸르고 생생한 생명의 빛깔이 문득 제주로의 여정을 꿈꾸게 한 것처럼. 그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지친 삶을 다독이는 위로가 되어준다면 그건 그가 이 푸르고 이국적인 섬의 생명 하나하나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리라. 난해하고 개념적인 미술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그림. 작가의 풍경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그 평온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그림. 김보희 작가가 그려낸 자연의 본질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뒤 에야 비로소 절실함을 깨달은 것, 평온하고 충만한 일상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