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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차영석 이토록 우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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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 서면 각각의 사물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물 안의 패턴이 드러난다. 타인의 무질서한 취향이 작가 안으로 들어와 나름의 질서를 이루는 과정. 그 너머에 차영석 작가의 ‘우아한 노력’이 있다. 연필로 켜켜이 새긴 그의 그림은 흐릿하고 가느다란 한 줄기 선에서 출발해 삶과 시대를 아우르는 놀라운 풍경을 완성한다.
화가 차영석의 작품 세계는 그가 지금껏 진행해온 작업 시리즈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물 너머로 일상과 사회현상을 들여다보던 ‘건강한 정물’에서 출발해 ‘습관적 세계’의 질서를 찾아냈고, 결국 ‘우아한 노력’을 통해 그간의 작업을 종합했다.
우리는 우아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예쁜 옷과 신발을 고르고, 마음에 드는 가구를 사 모으고, 그걸 이리저리 옮겨가며 어울리는 풍경을 찾는다. 사무실 책상에 나열한 작은 피겨들, 손바닥만 한 술집에 놓인 분재 컬렉션…. 어떤 이의 눈엔 조악할지 모를 그 풍경들조차 결국 우아해지기 위한 노력의 일부다. 화가 차영석은 바로 그 ‘노력’에 집중한다. 화병, 분재, 다기, 운동화 등 누군가의 손때 묻은 컬렉션을 하나하나 그림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가 채집한 건 일상 속 흔한 오브제이지만, 흐릿한 연필 선으로 지독하리만치 세밀하게 박아 넣는 건 그 오브제를 향한 수집가의 태도.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차영석 작가가 최근 몇 년간 기막히게 정교한 매 시리즈를 집중해 그렸다. 아예 다른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다. 도자기와 화병, 분재와 운동화로 가득한 여러 최신작과 마찬가지로 이 시리즈의 제목은 ‘우아한 노력(An Elegant Endeavour)’이다.
가장 최근의 개인전이 2018년에 진행한 <우아한 노력>입니다. 이 시리즈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요?
사실상 제 모든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초기작의 경우, 사람들의 생활 컬렉션을 통해 그들이 오브제를 모으는 태도나 취향을 관찰한 결과물이에요. 각각의 오브제를 하나씩 모아 저 나름대로 컬렉션을 만든 거죠. 그런데 타인의 취향에서 뭔가 뽑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제게도 어떤 취향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개인적 관심사와 애정까지 포함해 작업을 계속 확장해왔어요. 첫 연작인 ‘건강한 정물’부터 가장 최근 시리즈인 ‘우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입니다.
초기엔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사실 제가 학교를 오래 다녔어요. 원래 미술을 전공하다가 4학년 때 다시 한국예술종합대학에 들어갔거든요. 그렇게 8년간 학부생으로 공부했는데, 졸업할 때쯤 미술학도로서 일종의 사춘기가 찾아온 거예요. 생각이 많아졌죠.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작가가 될 수 있나? 내가 도대체 뭘 잘하나? 그렇게 고민하다 결정한 게 ‘초심으로 돌아가자’였어요.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 일환이고요.
하나의 작품을 연필로만 완성하는 과정이 보는 것만큼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미술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했거든요. 소묘나 드로잉을 기계적으로 해왔죠. 그러니까 연필이란 재료 자체에 사실은 진저리가 나요. 습관적인 테크닉이 튀어나올까 봐 평소 작업할 땐 일부러 피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연필 작업을 구상한 뒤 나름의 규칙을 정했어요. ‘연필로 그리되 최대한 지우개를 쓰지 말자’ ‘서양화의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무시하자’ ‘호흡을 천천히 하자’.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규칙을 지키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10년 가까이 강사 일을 했으니 손이 얼마나 빨랐겠어요. 그런데 속도를 최대한 절제하고 일정한 템포에 맞춰 손을 움직였더니 전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 나타나더라고요.
지금은 작품에 색감이 많이 더해진 것 같아요.
언제까지나 연필만 고집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저 시작을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 방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죠. 이후 연필 선과 어울릴 만한 색으로 금색을 골라쓰기도 했고요. 최근 운동화 연작을 그리면서는 아예 아크릴구아슈를 사용한 컬러 작업도 병행하고 있어요.
‘An Elegant Endeavour_142’, pencil and gold colour pen on black paper, 108.5×78.5cm, 2018.
‘An Elegant Endeavour_121’, pencil, colour pen and watercolour on Korean mulbery paper, 118×85cm, 2017.
지금 한창 작업 중인 운동화 연작. 아크릴구아슈로 채색했다.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이 운동화 연작인가요?
네, 예전에도 그리긴 했지만 최근 운동화를 수집하는 이들을 보면 이 사물에 부여하는 의미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고 느껴요. 게다가 운동화 하나에 무척 다양한 조형 요소가 들어 있더라고요. 요즘 시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오브제인 것 같아요. 사실 최근 2년간은 ‘우아한 노력’의 연장선에서 매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이번 <행복> 표지작도 그 중 하나고요. 매의 모습이 조형적으로 완벽하거든요. 형태나 포즈, 날개의 문양들까지 세세히 살필수록 너무나 아름다웠죠. 그런 조형적 오브제로서 접근했어요. 사실 매는 중동 지역에서 무척 귀하게 여기는 동물이에요. 매를 위한 병원도 있고, 여행할 때 비행기 좌석을 따로 구입하기도 하죠. 그런 행동도 일종의 ‘우아한 노력’이 아닐까 싶어요.
최근의 작업은 마치 동양화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 저를 동양화가로 오해한 분들도 있고요. 재미있는 건 판화지에서 한지로 종이를 바꾸면서부터 저 스스로의 감성이 동양화적 스타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전엔 관심 없던 한국화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또 그런 요소가 제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부분도 있고요.
다음 개인전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올해 말 아니면 내년쯤 진행할 것 같아요. 지금 구상 중인 작업은 풍경에 관한 시리즈예요. 그간의 작품이 대부분 정물로 이뤄진 삶의 풍경을 담았다면, 이번엔 아예 자연 쪽으로 넘어가보려 해요.
과한 장식과 패턴, 넘치거나 모자란 감각, 타인의 취향에서 채집한 그의 관심사는 이미 삶을 넘어 자연에 다가섰다. ‘건강한 정물’이 ‘습관적 세계’에서 ‘우아한 노력’을 지속하기까지, 그의 연작들도 무분별한 배열을 정돈하며 유연하고도 단단한 풍경을 완성해갔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뒤엔 매일 열 시간씩 연필을 손에 쥔 작가가 있었다. 그는 지난 개인전을 준비하며 이렇게 썼다. “<우아한 노력>은 어떤 면에서는 잡동사니 같은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존중만큼이나 나의 작업(의 과정)에 대한 위로와 존중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위로와 존중이 또 어떤 세계로 작가를 이끌지, 그 가느다란 연필심 끝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그의 ‘우아한 노력’을 다시 한번 기다린다.
차영석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에서 예술사와 예술전문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2009년 금호영아티스트로 선발되어 금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건강 한 정물>을 개최했고, 이후 네덜란드·싱가포르·중국·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개인 전과 단체전을 진행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