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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지형 익숙하고도 낯선 하이브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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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줄기에서 서로 다른 꽃들이 피어난다. 활엽闊葉과 침엽針葉이 공존하고, 꽃망울과 열매가 동시에 맺힌다. 김지형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온갖 기묘한 혼종으로 가득하다. 각각의 정체성이 뒤엉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세계, 모두가 익숙하고도 낯선 하이브리드 세계. 이곳에선 그 어떤 것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식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살필 때 그 느낌이 극명하게 달라진다. 김지형 작가가 식물에 유독 마음을 쏟는 건 그래서다. 그는 서로 다른 식물의 요소를 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낸다. 리놀륨 판화의 섬세함이 각각의 정체성을 하나로 모은다.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요소를 둘 이상 혼합한 것’, 하이브리드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김지형 작가는 주로 신형자동차 뉴스에서나 쏟아지던 이 차갑고 기능적인 용어를 물과 햇볕이 있는 생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판화와 일러스트레이션에 기초한 콜라주 작업을 통해 고양이와 양을 조합하고, 유칼립투스꽃과 방크시아잎을 한 줄기에 매단다. 그러니까 그가 만든 생명체는 언뜻 익숙해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낯선 존재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기준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존재. 그 혼재된 정체성의 근원을 알고 싶어 장막 뒤의 창조주를 찾았다. 무려 10년만에 그의 전시가 열린 드로잉룸 갤러리를 지나, 분당의 어느 주택가에 숨은 그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10년 만에 전시를 열었는데, 그간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는 줄곧 출판사들과 일을 했어요.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죠.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여러 사정이 생기다 보니 개인 작업이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림은 꾸준히 그렸지만 정작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은 못 한 거예요. 결국 3년 전쯤 작업실을 따로 구했어요. 이것저것 필요한 장비도 들이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죠. 이번 전시가 그 결과물인 셈이에요.
한국에선 판화를, 프랑스에선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 때는 4년 내내 판화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어요. 그러다 졸업하고 나니 좀 더 폭넓게 예술을 마주하며 다양한 영역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거예요. 처음엔 랭스 보자르(ESAD de Reims)의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다가 작업 방식이 저와 맞지 않다는 걸 느끼고 다시 스트라스부르 아르데코(ESADS)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어요.
Quercus Betula Munnozia, 콜라주, 색연필·아크릴·잉크, 38×28cm, 2019
Acer Eucalyptus Cepa, 콜라주, 색연필·아크릴·오일 파스텔·먹, 56×76cm, 2019
Ficuspudica Ginkgo Taraxacum, 콜라주, 색연필·아크릴·오일 파스텔·잉크, 56×76cm, 2019
첫 개인전 땐 동물에 관한 하이브리드 작업을 선보였죠?
유학 시절에 졸업 작품을 준비하며 처음 구상한 테마가 ‘하이브리드’였어요. 프란츠 카프카가 쓴 ‘크루자’라는 짧은 글에 반은 고양이고 반은 양인 동물이 나오는데, 거기서 영감을 받아 ‘크루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었죠. 이후에도 고래와 코끼리, 박쥐와 독수리 등 서로 다른 동물을 새로운 생명체로 재조합하는 작업을 계속했어요.
하이브리드란 테마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사람들은 무언가 낯선 것이 일상에 섞이면 일단 거부감부터 느끼는 경우가 많잖아요. 프랑스에 거주하는 동안 저도 그런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자주 겪었고요. 그래서 동물 하이브리드 작업을 시작할 때 인종 간의 차별이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친숙하고 동화적인 동물 모습으로 풀어내고자 한 거죠.
신작인 식물 시리즈도 그 연장선에 있겠네요?
하이브리드라는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소재를 찾고 싶었는데, 그때 떠오른 게 식물이에요. 평소 식물 형태에 무척 관심이 많았거든요. 식물이 눈앞에 있으면 어느새 제가 잎모양이나 꽃 구조 등을 유심히 살피고, 또 그걸 자꾸만 눈으로 그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주제로 작업하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확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나름의 확신도 얻었고요.
판화나 드로잉도 있지만 콜라주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네, 맞아요. 주로 콜라주 기법을 사용했어요. 종이에 그림을 그려 색연필이나 물감으로 칠한 뒤 그걸 오려 붙이는 방식이죠. 그 위에 또 드로잉을 얹거나 색을 덧칠하기도하고요. 사실 판화는 식물 하이브리드 작업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예요. 작업이 구상한 대로 잘 진행되지 않아 리놀륨 판화로 먼저 시도해봤거든요. 보통 리놀륨 판을 반복적으로 깎다 보면 거의 무아지경 상태가 되는데, 그러면서 손도 풀리고 작업량도 확 늘었어요. 덕분에 콜라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죠. 앞으로도 판화, 일러스트, 드로잉, 콜라주 작업을 계속 병행해나갈 생각이에요.
다섯 명의 작가와 함께 쓰는 작업실. 김지형 작가는 이곳에서 주로 판화 작업을 한다.
‘리노컷’이라고도 불리는 리놀륨 판화는 작업 방식이 목판화와 동일하지만, 목판보다 조각하기 쉽고 유성 잉크와도 잘 맞는다.
작업실에 큰 판화 장비들을 들이며 작가의 작업도 훨씬 폭넓어졌다.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첫 번째 컬러 작업인 ‘Eucalyptus Bobine’에 유독 마음이 가요. 이번 <행복> 표지에 실린 작품이죠. 여기엔 유칼립투스꽃과 잎, 씨방 등을 방크시아 이파리와 조합했어요. 모헤어 볼이나 실, 바늘처럼 식물 외 오브제도 섞었고요. 특별한 의도가 있다기보다 하나하나 형태를 그려붙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결됐는데, 주변에서 다양하게 해석해주는 분이 많아요. 그게 이 시리즈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음에는 동물과 식물을 조합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고민한 방식 중 하나예요.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아 일단 포기했지만, 앞으로 또 어떤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는 거니까요. 지금 은 식물에 의상을 접목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제게 식물만큼이나 흥미로운 소재가 고전 의상이거든요.
하나의 줄기에서 피는 서로 다른 꽃처럼 하이브리드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다. 혼합, 혼성, 혼혈. 각각의 존재가 지닌 정체성이 마구 뒤섞임으로써 나타나는 이미지. 김지형 작가가 만들어낸 하이브리드 세계엔 완벽한 익숙함도 완벽한 낯섦도 없다. 익숙한 것이 돌연 낯설어지고, 낯선 것이 점점 익숙해진다. 작가는 그 경계에서 끊임없이 작업을 확장해간다. 이제 막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의 이야기는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김지형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학과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프랑스의 랭스 보자르와 스트라스부르 아르데코에서 디자인 및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엔 다수의 책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선보였으며, 경원대학교와 동서대학교, 홍익대학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 출강했습니다.
리놀륨 판화 클래스
김지형 작가의 리놀륨 판화 클래스에 초대합니다. 작업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제공합니다.
일시 2020년 2월 24일(월) 오후 1시 30분
장소 서울시 중구 동호로 272 디자인하우스
참가비 7만 원(정기 구독자 6만 원)
인원 10명
신청 <행복> 홈페이지 ‘클래스’ 코너 또는 전화(02-2262-7222)로 신청하세요.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