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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작가 김희앙 황홀한 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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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기도, 열매 같기도, 무기 광물 같기도 한 이 어여쁜 덩어리는 실은 버섯이다. 사진 작품 같기도, 조각 같기도 하지만 실은 브로치·목걸이·귀고리·부토니에르 같은 장신구다. 버섯에서 무한 증식과 분해라는 자연의 섭리를 포착한 젊은 장신구 작가 김희앙. 그가 이 황홀한 음지의 꽃에 푹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장신구 작가 김희앙은 국민대학교 조형대학과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공부했습니다. 버섯을 모티프로 한 그의 장신구 연작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2015년 대만 국제 금속공예전에서 퀄러티 어워드Quality Award를, 같은 해 독일에서 BKV-Prize를 수상했습니다. 2016년 프랑스 알리아주Alliages에서 레거시 어워드Legacy Award를 수상하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2018년 갤러리 아원에서 첫 번째 개인전 <포착된 순간>을 열었습니다.
버섯 주름살의 반복적 구조와 결이 대단한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서서히 11-4’, 브로치, 정은·석분 점토·수지 점토·아크릴물감, 107×120×52mm, 2018.
썩어가는 참나무 등걸,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고 고목의 몸에 뚫린 상처마다 버섯 무리가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 나무가 썩어갈수록 버섯 무리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난다. 장신구 작가 김희앙이 주목한 것이 바로 버섯이다. 소리 없이 자라나 숲속, 도시 속 여백을 채우는 이 생명체의 미약하고도 치명적 존재감.
본래 버섯은 식물도 동물도 아닌, 그 사이에서 ‘균류’라는 독립된 영역을 차지한 독특한 생명체다(곰팡이와 버섯이 균류에 속한다). 식물처럼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도, 뿌리를 갖지도 못한다. 대신 나무껍질, 낙엽, 나뭇등걸, 동물 사체처럼 죽어가는 생물에서 자라고, 죽은 생물로부터 나온 양분을 흡수하며 살아간다.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언제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금방 돋아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이 생명체에게 고대인은 ‘요정의 화신’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디서 피었느냐에 따라 형태와 색이 천천만만인 버섯의 신비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금속공예를 배운 후 장신구 작가의 길을 걷는 김희앙. 2015년부터 버섯을 모티프로 한 연작에 몰두하는 그에게 버섯은 어떤 존재인 걸까?
금속공예를 전공한 작가가 만드는 버섯이라니요. 버섯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대체 뭘까요?
갓 피어난 생명, 다 성장했거나 허물어져가는 생명이 군집한 것에 늘 관심이 갔어요. 작은 개체들이 얼기설기 뭉쳐 한 몸을 이룬 형태에도 늘상 눈길이 갔고요. 산책길에 만난 버섯 군집이 바로 그런 생명체였죠. 대학원 과제를 할 때 보니 나도 모르게 버섯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버섯 관련 책을 탐독하고, BBC Earth를 시청하고, 자연도감을 들여다보고. 그렇게 몰두하니 이 생명체에 더 빠져들더라고요.
게다가 버섯으로 만든 장신구라고요?
버섯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 채 조용히 피었다 조용히 사라지잖아요. 이 생명체를 주인공처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달까요. 사실 균류란 게 우리 몸에도 피어(곰팡이균) 함께 사는 존재이니 몸에 부착하는 장신구로 구현해도 뜻이 어우러질 거고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아직 생소하지만, ‘착용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이라는 면에서 예술 장신구라는 분야가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착용하는 것 모두 즐거움을 주는 오브제 작업, 바로 예술 장신구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모든 작업은 먼저 실물 크기로 스케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밀대로 얇게 밀고 아크릴물감으로 색을 낸 폴리머클레이 조각을 한 겹, 한 겹 붙여나간다.
종로의 작은 작업실에서 하루 열 시간 가까이 작업에 몰두하는 김희앙 작가.
버섯처럼 보이지 않는 작품도 있어요.
어떤 환경에서 서식하느냐에 따라 형태와 색이 다른 버섯은 그 신비가 다 밝혀지지 않았죠. 이런 버섯도 어딘가엔 있을 거라 생각하며, 상상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해요. 누군가는 이를 두고 솔방울 같기도, 꽃 같기도 하다고 하죠.
유아 미술 재료로도 쓰는 폴리머클레이가 주재료던데요.
말 그대로 polymer(고분자 화합물)+clay(점토)입니다. 자연 건조시키는 컬러 클레이와 달리 오븐에 구워서 건조시키는 클레이로, 조색과 성형이 자유로워요. 마르고 나면 견고해지고 내수성도 생기죠. 필름처럼 구부러지는 유연성도 지니고 있고요. 주름살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았는데, 이만한 재료가 없더라고요. 밀대로 얇게 민 폴리머클레이 한 장 한 장이 모여 수십, 수백 개의 주름을 만들어내죠. 가장자리를 가위로 정리하기도 하고요. 폴리머클레이 외에도 에나멜, 플라스틱, 정은, 실 등 여러 소재를 섞어 쓰기도 합니다. 브로치 한 점을 만드는 데 하루 7~10시간 정도 작업할 경우 대엿새 정도 걸려요.
김희앙의 작품이 단지 자연의 모방을 넘어 작품으로서 율동감을 지니는 건 선명한 보색 대비의 덕도 있는 듯해요.
원래 폴리머클레이는 노란빛이 도는 흰색이에요. 여기에 아크릴물감을 배합해 색을 입히죠.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은 볼수록 황홀해요. 여러 가지 색의 조화로 탄생하는 이미지는 버섯이 피어난 시작점이자 단서가 되죠. 이 색들은 그 작업을 할 때의 내 기분, 당시 내가 몰두한 취향을 나타내기도 해요. 요즘엔 뉴트럴 컬러에 푹 빠졌죠.
버섯이 들려주는 증식과 순환의 이야기
어린 나무도, 젊은 나무도 아니고 비바람과 세월에 삭아버린 고목이 빈 가슴에 버섯을 키운다. 버섯은 죽어가는 생물로부터 영양분을 얻는 과정에서 생물 사체를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고, 점점 더 썩게 해서 흙을 기름지게 만든다. 그래서 버섯을 ‘분해자’라 부른다. 버섯을 피운 나무는 마침내 죽고 만다. 슬프지만 그 나무를 분해하며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버섯과, 새 생명에게 제 몸을 내주는 고목에서 자연의 모든 존재를 경배하게 된다. 김희앙 작가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분해와 순환, 증식의 이야기다.
‘피고 지다 4’, 목걸이, 정은·폴리머클레이·석분 점토·아크릴물감, 182×194×21mm, 2017.
‘증식 23’, 브로치, 정은·폴리머클레이·아크릴물감, 98×157×48mm, 2017.
‘증식’이 김희앙 작가의 주요 테마라고요?
버섯을 가까이 들여다보세요. 언뜻 보면 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몸체가 실 같은 얇은 균(균사)으로 구성된 게 눈에 들어올 거예요. 버섯은 땅속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균사로 퍼져 있다가 그 균사들이 모이고 엉겨서 버섯으로 피어난대요. 피어난 버섯은 다시 포자를 뿌리면서 다른 버섯이 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동물은 그것을 먹고 이동해 다른 데 뿌리죠. 이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제가 작품에서 증식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됐어요. 작은 것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걸 바라보는건 그 자체로 무궁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죠. 작품의 제작 과정도 증식의 이미지와 비슷해요.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수백 장의 점토를 켜켜이 쌓아 붙여갈 때의 기분은 ‘증식’의 주체가 되는 것 같아 황홀할 지경이죠.
신인상처럼 평생 한 번뿐인 첫 개인전의 주제를 ‘포착된 순간’이라 잡은 이유가 뭔가요?
이 작은 생명이 자신도, 타인도 모르게 생명 활동을 가열차게 하는 그 순간을 포착해주고 싶었어요. ‘증식’을 테마로 하는 작업이니 “작품이 크고 덩어리 개수도 많아야 하지 않나”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저는 단지 생명이 피어나는 순간의 아름다움,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에요. 균사와 버섯처럼 내가 만든 장신구도 누군가의 몸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증식해가길 바라고, 누군가 그 순간을 포착해준다면 마냥 기쁠 것이고요.
아무도 없는 나무둥치 밑에서 얼금얼금한 무늬 드러내며 무더기로 피어나는 버섯에서 존재의 고귀성을 깨달은 젊은 작가 김희앙. 금속 공예가라는 매끈한 수식 대신 장신구 작가의 소신을 꿋꿋이 펼치는 그의 버섯 장신구는 그래서 어여쁘다. 땅속에서 치솟는 열기를 그러모아 피어나는 버섯처럼 자신의 성정대로 고요히 작업하다 마침내 열기를 후드득 피어낼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