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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김제민 잡초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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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이름이 있지만 ‘잡초’라는 통칭으로 거칠게 묶이는 녹색 풀. 김제민 작가는 회색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에서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자라나는 푸른 생명을 자유로운 선으로 묘사한다.
화분에 돋아난 잡초가 은근슬쩍 화초에 어깨동무를 하는 듯한 작품의 제목은 ‘좋은 친구’. 김제민 작가는 남과 다른 외모로 원치 않는 관심을 받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일상 속 아이러니를 식물을 통해 재치 있게 표현한다.
“풀은 환경이라는 캔버스에 자연이 천천히 하는 드로잉이라고 생각해요. 의도하지 않은 조형이지만 싱그럽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식물의 선. 그 시각적 즐거움을 담고 싶습니다.” 갈대가 요가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쑥이 트레드밀에서 땀을 흘리며 내달린다. 작품의 제목은 ‘잡초끈질긴 생명력 기르기’. 과속방지턱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앙증맞은 작은 풀을 그리곤 ‘이 바닥에서 살아가기-속도를 줄이세요’라는 제목을 붙인다. 잎과 줄기가 축 늘어진 대나무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있는 그림―물론 제목은 ‘야근’이다―에선 급기야 실소가 터진다.
외래종으로서의 삶
김제민 작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식물을 그린 드로잉과 회화로 삶과 일상에서 느끼는 아이러니를 재치 있게 표현한다. “동료 작가나 관객이 제 작품을 보고 소리 내어 웃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유머는 심각한 메시지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좋은 수단이니까요. 뭐 그리 심오한 메시지를 그림에 담지는 않지만요.” 평소 농담하길 즐기지만, 주변에선 ‘아재 개그’ 좀 그만하라는 지청구를 듣는다는 김제민 작가는 도시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든 비집고 나와 자라니까요. 유학생이던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부터 줄곧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과 다른 외모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다행히 그리 대단한 차별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늘 부담스러웠습니다. 모두 저를 궁금해했으니까요.” 판화로 제작한 ‘외래종으로서의 삶’에서 외래종 식물은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걷는다.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절로 나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그저 웃어넘길 수는 없다. “외래종 작물이 환경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는 뉴스를 보고 조금 돌려 생각해봤어요. 그 풀들은 어쩌다 낯선 땅에 와서 그런 취급을 받으며 고생해야 하는 걸까?”
김제민 작가는 동양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림이 직업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역사를 공부하고 사회현상에 관심을 두던 1990년대 초ㆍ중반, 박재동 화백의 시사 만화에 매료된 그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동네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만화책을 읽을 때면 그림의 세부를 뜯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그이지만, 화실에서 그린 그림이 한 장 한 장 쌓일수록 만화는 성에 차지 않았다. “만화에서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지요. 이야기를 위해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고 생략하는 만화보다는 불필요한 것까지 다 포함해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는 미술 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성이었을까? 뒤늦게 시작한 입시 미술이었지만 그해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 합격했다. 그 후로 그는 작가가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이 바닥에서 살아가기’, 종이에 구아슈, 50.5×71.5cm, 2018
‘Usual Suspects ’, 종이에 수성 마커, 43×75.6cm, 2016
누군가 택배를 “현대인의 가장 큰 기쁨”이라 했던가? 5월호 표지작인 ‘택배왔다’에선 누런 택배 상자를 열자 온갖 잡초가 고개를 내민다. 상자 옆에 황망하게 놓인 문구용 가위의 모습이 왠지 익살스럽다. 그 상황에 나라면 어떤 기분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잡초 입장에선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자기 의도와 달리 실려 왔을 수도 있지요.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친구 중에 한의사가 있는데, 그림을 보더니 약재 이름을 줄줄 읊더군요.(웃음)” 영화에서 제목과 장면을 차용한 2016년 작 ‘Usual Suspects’에서 마치 범죄 용의자들처럼 서 있는 잡초는 농림부에서 발간한 잡초 목록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최악의 잡초’로 선정되었다지만, 뿌리를 내리고 씨를 퍼뜨리는 것이 일인 이들의 입장에선 자못 부당한 처사이리라.
‘무심한 풍경’, 종이에 목탄, 75×105.5cm, 2016
어떤 공생 관계
최근 김제민 작가가 그리는 ‘무심한 풍경’ 연작은 전작과 사뭇 다르다. 자연이 그리는 드로잉, 즉 잡초의 자유로운 선을 강조한 드로잉 작품. 구체적 이야기를 담기보다는 조형적 쾌감을 중시한 작업이다. 얽히고설킨 잡초의 선을 눈으로 좇으며 다양한 생각이 샘솟는다. ‘무심한’이라는 수사의 주어는 잡초를 보는 우리일까? 아니면 도시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잡초일까? “자신을 응당 뽑아내야 할, 가치 없는 잡풀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잡초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잡초를 그리며 식물에 대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식물도 도시에 맞게 진화합니다. 도시에 사는 잡초를 숲에 옮겨놓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논과 밭을 만들고, 태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맞게 자라난 거지요. 공터에 난 풀도 그곳이 공터가 아니었다면 자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어찌 보면 사람과 잡초는 공생 관계이기도 한 것이지요.” 남과 다른 외모를 자화상으로 그리던 김제민 작가는 보다 보편적 소재를 고민하다 도시에 자라는 잡초를 주목했다. 누구도, 어쩌면 자신조차도 바라지 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잡초를 통해 바라본 우리의 삶, 그리고 다시 우리를 바라보는 잡초의 입장. 작가로서 목표를 묻자 “글쎄요, 좋은 작가? 아니 그러면 지금은 좋은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가 될 테니까 더 좋은 작가? 뭔가 더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 꺼내는 그의 이야기. “제 그림이 좀 헐렁하고 여백이 많아요. 미술은 많은 사람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끄는 영화나 대중음악과는 다릅니다. 순수 미술이 그러기는 어렵고, 그런 길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제가 택한 길이기도 합니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제 그림을 보고 웃고, 조금 더 나아가 작품에 담긴 복합적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면 작가로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제민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도시 속에서 자라는 식물을 드로잉과 회화, 판화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그는 소마드로잉센터, 아트팩토리, 갤러리 버튼 등에서 개인전 10회를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식물을 통한 치유’를 주제로 올 6월 전남대병원 갤러리에서 열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