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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정헌칠 기운생동! 삽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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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붓에 먹을 찍어 눈에 보이지 않는 속털부터 기다란 터럭까지 한 올 한 올 선으로 그어 완성한 삽살개 그림. 따뜻하고 유쾌한 정헌칠 작가의 작품 속엔 그의 우직한 고집과 뚝심이 가득하다.
‘회상’, 한지에 수묵담채, 97×65cm, 2010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난 정헌칠 작가는 신라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인사아트센터 <삽사리 꿈에서 노닐다>, 2013년 장은선 갤러리 <동행>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미술대전, 삼성미술대전, 대한민국 미술대상전 등에서 수상했다. 1월 한 달 동안 복합문화공간 인사1길 ‘행복한상’에서 전시한다.
‘삽사리’라고도 불리는 삽살개는 온몸이 긴 털로 덮인 토종개다. 신라시대 왕가와 귀족 가문에서 주로 기르던 개로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해왔다. 삽살개라는 이름은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긴 털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아 귀신이 무서워했기 때문이라고. 한국화가 정헌칠은 얇은 화선지에 수묵과 수채 물감을 수없이 겹쳐 그은 선으로 삽살개를 그린다. “삽살개의 눈을 가린 털을 쓸어 올리면 그 눈동자가 얼마나 크고 맑은지 모릅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삽살개를 품에 안으면 더없이 따스하고 푸근한데, 그림을 통해 그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세필을 똑바로 세워 삽살개의 기다란 터럭 하나하나를 공들여 그려 완성하는 정헌칠 작가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 진가가 드러난다. 가늘고 정교하면서도 힘 있게 그려진 삽살개의 털 한 올 한 올이 마치 조선시대 화가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의 수염 터럭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삽살개를 그리기 시작한 건 9년 전의 일. 한국화 대가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섬세하면서도 우직하게 하나를 깊게 파고드는 정헌칠작가를 눈여겨본 스승이 가는 선을 무수히 겹쳐 살아 움직이는 대상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표현하는 동물화를 그에게 권했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줄과 끈으로 매여 있는 개의 처지가, 늘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며 살아온 자신의 삶과 비슷해 보여 그리게 되었다는 정헌칠 작가.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작품에서 자유로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는 삽살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교감’, 한지에 수묵담채, 95×55cm, 2009
삽살개를 주로 그리는 건 그리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 “삽살개는 긴 털 때문에 골격이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다. 털이 짧은 개는 몸의 윤곽과 움직임을 표현하기가 훨씬 쉬워요. 하지만 삽살개는 눈에 보이는 형상 안의 구조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그려야 합니다. 조금만 잘못 표현해도 어색해 보이기 십상이지요.” 먹을 빠르게 흡수하는 장지 대신 얇고 다루기 어려운 화선지를 선택한 이유도 비슷하다. 화선지에 선을 여러 번 그으면 먹이나 물감이 번지기 때문에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세필을 세워 얇은 선이 뭉치지 않도록 힘 있게 긋기 위해선 먹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수천수만 번을 공들여 그은 선으로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 작품에 실수로 먹이 번져 처음부터 그리는 일이 허다하지만, 정헌칠 작가는 오직 화선지에서만 가능한 맑은 느낌을 내기 위해 스스로 택한 어려운 작업 방식을 고집한다.
화선지에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헌칠 작가는 두어 점 이상의 작품을 함께 작업한다. 보이지 않는 안쪽의 털 하나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선을 쌓아 올려 입체를 완성한다. 선으로 만드는 덩어리, 터럭 하나하나를 그어 완성한 삽살개. 그리기 어려운 대상을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로 가장 작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털 하나부터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 그림을 완성하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보통 한 달 이상. 정헌칠 작가는 그 과정이 고되고 어려운 만큼, 제대로 완성했을 때의 쾌감이 더욱 짜릿하다고 말한다.
다 자란 삽살개가 앞발을 들고 일어난 모습이 귀엽고도 기운생동해 따뜻한 웃음을 짓게 하는 1월호 표지작 ‘망추望秋 -가을을 바라보다’는 지난 2011년 작가가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치른 직후에 그린 것이다. 작업실에서 하루 열 시간 이상 그림만 그리던 그가 전시를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한 설렘과 흥분을 표현한 작품.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후 생업과 그림을 병행해온 작가는 새해를 맞아 다시 한번 작업에 전념하리라 다짐한다. 마침 개띠 해이기도 하니 말이다. “‘유모취신遺貌取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태를 버리고 정신을 취한다는 의미이지요. 예로부터 동양화가들은 중요한 부분은 강렬하고 자세하게 표현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생략했습니다. 털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온 힘을 다해 그려야 하지만, 선을 긋는 횟수를 조금씩 줄여가면서 표현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때를 벗겨낸달까요? 처음 삽살개를 그릴 때는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털을 최대한 빼곡하게 그렸는데, 차츰 공간의 여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습니다.”
정헌칠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한 시간 정도 붓글씨를 쓰며 마음을 가다듬고 손을 푼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어려운 화법을 고집하며 느리지만 꾸준히 자신의 작업 세계를 일구어나가는 정헌칠 작가, 무술년 황금개띠 해인 새해엔 푸근하고 따스한 그의 삽살개 그림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보일 수 있기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