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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오세열 누구의 스케치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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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열 작가는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학고재 상하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을 가졌다.국립현대미술관(과천), 대전시립미술관, 프레데릭 R. 와이즈만 예술재단(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국내외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오후 3시, 가로로 길게 낸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마룻바닥에 사다리꼴 모양을 그린다. 흰 벽과 고요를 깨뜨리는 새소리뿐. 작가의 작업실이라기 보다는 작은 미술관 같다. “이젤은 치웁시다. 화가의 작업실에 왔는데 이 젤을 앞에 놓고 촬영하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요?” 지금의 양평 작업실 로 옮긴 지 2년째. 건축과 조경 분야에 조예가 깊은 오세열 작가의 개인 후원자가 오직 그만을 위해 완성한 작업실이다. “언제나 집과 작업실은 따 로 둬요. 작가에게는 긴장감이 있어야지. 긴장과 집중, 그거 빼면 작업 못 하지요. 어쩌다 파리 한 마리 들어오면 그날은 작업하기 힘들어요.” 오세열 작가가 지난 2008년 샘터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9년 만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 <오세열: 암시적 기호학OH SE-YEOL: Semiotic Metaphors>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연대별로 추린 그의 작 품 50여 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최근작엔 유난히 숫자가 눈에 많이 띈다. “바닷가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유년 시절, 몽당연필에 침 묻혀가며 종이에 숫자를 쓰고 낙서를 하 던 기억이 떠올라 숫자 작업을 하게 됐어요. 숫자라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 빠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린아이가 글자보다 먼저 배우고 스스로 ‘그리는’ 첫 번째 기호이기도 하지요.” 숫자로 빼곡히 채워진 화면 중간중간 낯익은 오브제는 작가가 길가에 버려진 폐품을 모아 콜라주 형식으로 작 업한 것이다. “찌그러진 병뚜껑, 단추, 몽당 색연필 등은 일상을 채우는 사 소한 소품임과 동시에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이지요.” 작가의 작업실 책상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색색깔 단추와 손톱만큼 작고 매끄러 운 돌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다 쓴 물감과 종이 박스 등이 정돈되지 않 은 채 자유롭게 놓여 있다. 고정관념, 틀에 박힌 것이라면 질색하는 그의 자유분방한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다.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건 작가로서 위험한 거예요. 관념화된다는 증거지요. 그래서 제 작품엔 제목도 없어요. 관객이 전시를 볼 때 자기도 모르게 제목부터 봐요. 그러면 작가의 의도와 점점 멀어지고, 순수한 의미로서 감상이 어렵죠. 그래서 액자도 따로 하지 않아요. 첫눈에 본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채의 작품을 봐주기를 바라는거죠.” 2013년 작품인 표지작 ‘untitled’ 역시 제목이 없다. 작가는 사각지 대에서 꿈을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 장애가 있는 아이들 등 세상에서 소 외된 아이들 모습을 그려왔다. 푸른 초원에 누워 쉬고 있는 아이가 어디선 가 날아온 새 한 마리를 응시하는 이 작품은 서로 친구가 없는 두 존재가 소통하며 고독을 나누는 모습을 담았다.
‘무제’, 혼합 매체, 97×130cm, 2017
오세열 작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단색 혹은 두 가지 색으로 구성한 화 면 아래 실은 무수한 색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캔버스 위에 적어 도 일고여덟 번 색을 덧칠해 화면을 완성한다. 화면의 밀도와 깊이를 살리 기 위함이다. 밑칠을 수차례, 그 위엔 붓이 아닌 면도칼이나 나이프로 일일 이 긁어 숫자나 문자, 문양을 만들어내다 보니 오세열 작가가 하나의 작 품을 완성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림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완 성되면 오히려 불안하다는 작가는 자신이 만족하는 ‘뒷맛’이 날 때까지 작 업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캔버스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해요. 그림은 곧 나지요. 붓이 아닌 나이프를 이용해 밑 작업한 캔버스 위에 질감을 만드는 행위는 내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와도 같아요. 인생에 즐거움만 있는 건 아니거든. 농부가 밭을 갈 듯, ‘노동의 맛’을 추구하는 거지요. 요즘 젊은 이들의 취향과는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산뜻하고 예쁜 그림을 찾 으니까. 제 그림은 겉절이가 아니라 묵은지 같은 겁니다.”
오세열 작가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우던 초등학생 시 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옆길로 새지 않고 그림을 그려왔다. 주변 60~70대 원로 작가들이 지금까지 해온 작품에 안주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가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것 이 그의 바람. 2015년과 2016년에 파리, 런던, 벨기에, 상하이 등에서 개인 전을 개최한 그는 오는 5월 강화도 해든미술관에서 개인전을, 11월엔 학고 재 갤러리에서 인물화만 가지고 또 한 차례 개인전을 열고, 내년과 후년 즈 음에는 미국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많은 작가가 처음 구상한 대로 작품을 완성하지만, 내게는 처음의 구상 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작업 중인 저 그림 보이죠? 결국 어떻게 끝 날지 나도 몰라요. 그래서 스스로도 늘 흥미를 잃지 않고 작업에 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을 쓱쓱 메워나가듯 일흔이 넘은 작가는 그렇게 시종일관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 묻은 노란색 물감이 눈에 들어왔다. 채 마르지 않아 그가 손을 맞잡거나 뗄 때마다 다 른 손가락의 마디마디에 묻어났다. 관념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에서 멀어져 무의식적인 것, 본능적인 것과 가까워지는 것, 그렇게 순수의 세계로 주저 없이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평생 그림만을 생각하고 꿈꾸며 그려온 오세열 작가의 힘이 아닐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