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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 한선주 사소하고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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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주 교수는 조선대학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원광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 광주, 제주, 일본, 호주 등에서 총 열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덴마크 코펜하겐의 <아시아 섬유미술전> <국제 종이작가 초대전>, 서울리빙디자인페어 <한국현대공예아트페스티벌 초대전> 등 국내외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 1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주의 디자인’ 큐레이터로 활동했고, 현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섬유・패션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3년, 일본 유학 중이었어요. 룸메이트와 오사카 항에서 열리는 퍼레이드를 보러 갔지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무척 큰 요트를 봤는데, 오후 6시쯤 되자 태양 빛을 받아 빛나며 펄럭이던 흰 돛이 석양빛과 함께 붉게 물드는 거예요. 그 경이로운 순간을 지켜보면서 마치 하느님과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한선주 교수는 그때의 영감을 간직한 채 한국에 돌아와 ‘공간’사옥에서 ‘오후 6시’라는 섬유 설치 작업을 선보였고,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직조를 전공한 경험과 지식을 살려 1988년에는 <수직의 기초>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이 전국 섬유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9월 5일까지 삼청동 아원갤러리에서 섬유조형전 <채집과 변형>을 여는 한선주 교수. 그는 이번 전시를 “다시 태어나서 시작하는 작은 전시”라고 말했다. 2년 전 큰 사고로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지고 내부 장기에 손상까지 입어 힘겨운 시간을 보냈기때문.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다시 이렇게 잘 살고 있네요. 무리를 할 수 없다 보니 크기가 큰 설치 작업은 엄두를 못 내고 예전에 한 커피 필터를 이용한 작업을 다시 하고 있어요.” 커피 필터와 한선주 교수의 인연은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덕분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원두커피를 마셨는데, 일본으로 유학 가서 처음으로 커피 필터라는 것을 사용했죠. 그런데 어느 날 다 쓴 필터를 버리려고 보니, 그 얼룩이 너무 자연스럽고 멋진 거예요.” 이번 전시에서는 커피 필터를 모아 면 자체로도 활용하고, 프레임 안에 넣어서 조형물로 만들기도 했다. “10년 넘게 꾸준히 커피 필터를 모아왔어요. 그건 ‘채집’이고, 그 커피 필터를 가지고 다른 재료와 함께 다양한 작품을 만들면 그게 바로 ‘변형’인 거죠. 그래서 이번 전시의 제목이 <채집과 변형(The Collection and Variation)>입니다.”
1 ‘Around my town Ⅵ’, 사용한 커피 필터, 실크, 자카드 직물, 실, 2014
2 ‘Variation Ⅷ’, 사용한 커피 필터, 한지, 다양한 직물, 실, 베틀 북, 2015
한선주 교수의 집에는 산책길에 주워 온 온갖 물건이 가득하다. ‘관찰과 채집’이야말로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 솔방울, 떨어진 꽃잎, 나무 열매, 마른 풀잎같은 것을 집 안에 들이고 곁에 두면서 어떻게 창작물과 결합해 활용할지 구상한다. “섬유를 만지는 사람은 물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주워요. 재료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죠.” 호주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재직할 땐 태즈메이니아 섬의 큰 집에서 혼자 살았다. 개 한 마리와 닭 열네 마리가 있는 스위스 출신 조각가의 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그는 아직도 그 섬을 그리워한다. 유칼립투스 숲 주변에 떨어진 청동빛 도는 밤색 열매, 때때로 바닷물에 떠내려오던 부목, 작은 조개껍데기, 갈매기 깃털 같은 것도 모아두었다. 담양에서 16년간 살 때에는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주워 온 솔방울을 투명한 유리병에 연도별로 모아두기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광주 무등산 자락의 아파트에는 사계四季의 자연미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사계절을 피부로 느껴요. 오늘도 외출해서 돌아오다가 떨어진 호박나무 꽃술을 몽땅 주워서 테라스에 말려두었지요.” 이번 호 표지작품 ‘Variation V’ 역시 사용한 커피 필터에 한지, 다양한 직물, 색실을 가지고 자연 풍경, 사계절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한선주 교수가 걸어온 인생을 들어보니 “예술가의 관찰자적 역할은 주변의 자연을 보고 만지고 느끼는 활동”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소하고 익숙한 풍경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수많은 물성을 재발견하는 것, 그 재발견에서 새로운 감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삶의 원동력이 된다. 오랜만의 개인전을 앞둔 한선주 교수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 예전처럼 큰 설치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고 사소한 작품들을 선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랜드피아노만큼 커다란 베틀 앞에 앉아서 규모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가 모은 수백 가지 결이 있는 커피 필터처럼 한선주 교수가 쌓아갈 또 다른 삶의 흔적이 그의 다음 전시에 오롯이 묻어나기를 기대해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