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도자기를 다수 소장한 오사카 민예 박물관의 도자기를 재현했다. 패브릭 캔버스와는 달리 흙이라는 물성이 작품 상단에 찍힌 청색 손자국으로 확실히 드러난다. 이 손자국으로 작품의 현대성에 방점이 찍힌다.
중원中原(넓은 들판의 중앙. 경쟁하는 곳이나 다투는 무대)에 한 남자가 살았다. 흙 만지는 것이 좋아 미대에서 도자기를 전공했지만, 현대 미술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곡선보다 직선, 입체보다 평면에 더 이끌리니 현대 미술의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나 천성은 흙 만질 때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도자기 작업을 열심히 해도 그 남자의 마음에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2할의 허기가 있었다.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자신, 서양 철학 서적을 독파해도 현대 미술의 길을 찾지 못하는 현실, 그 굴레에서 그는 조금씩 위축되어갔다. 육체의 질량은 변하지 않았으나 속이 쪼그라드는 자신을 넓은 들판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는 프로 선수처럼 산악자전거를 탔고 유목민처럼 두루 다니며 살았다. 지인을 만나러 베이징에 들렀다 호기심에 이끌려 중국 장시 성 징더전景德鎭에 찾아가기 전까지 그의 삶은 이러했다.
조선 시대 청화백자를 3mm 두께의 평면 회화로 재현했다. 곡선과 전통미의 백자와는 대조적으로 모노크롬화를 연상시키는 분홍 면은 겹겹이 연결한 종이에서 영감을 받아 세로로 굵은 줄기를 층으로 조각했다. 좌우 양면 이미지와 색상은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며 21세기 예술에 편입된다.
예상을 넘은 예상 1 흙으로 현대 미술을 할 수 있다니!
6년 후, 중원에 예상치 못한 소동이 벌어졌다. 흙이라는 기대 밖의 재료로 현대 미술이라는 예상 밖의 무공을 하는 한 고수의 출현으로 미술계라는 안정화된 중원이 요동쳤다. 한눈에는 도무지 물성을 파악할 수 없는 매끈한 평면 위에 기존의 두께 인식을 뛰어넘은 아주 미세한 두께의 도자기가 은근하게 솟아난 이 희한한 작품 앞에서 강호의 관객은 감탄했고, 오랫동안 무공을 닦은 고수는 새 별의 기법과 구현에 혀를 내둘렀다. “벽에 걸린 도자기인가요?” “바탕이 패브릭인가요?” “혹시 채색까지 작가가 직접 한 건가요?” 서울에서, 베이징에서, 뉴욕에서, 팜비치에서 초청을 받고 찬사가 이어지고,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이전에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이고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니 너도나도 궁금해할 수밖에. 한 도예 전문 잡지는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밀함에 모공이 송연해지는 전율을 느꼈다”라고 평했으며, 한 일간지는 “3D의 도자기가 2D 형태로 제작되는 그만의 작품은 일반인의 상상과 예상을 뛰어 넘는다”라고 보도했다.
뉴욕의 신Shin 갤러리에서 전시할 때는 관객의 수많은 질문에 답하느라 전시 안내자의 목이 쉬었으니 관객을 위한 비디오 형식의 작품 설명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 햄프턴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보고 즉시 초청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 왈리핀들레이 갤러리(1백4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의 유명 현대 미술 전문 갤러리)의 팜비치 갤러리는 기존 작가들보다 두세 배나 두꺼운 60페이지에 가까운 도록을 제작해 3월 16일까지 4개월간 그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동시에 한국에서는 몇해 전 그룹전으로 작가의 작품을 소개했던 L153 Art Company가 또다시 그의 개인전 <예상을 뛰어넘은 예상>을 기획해 박여숙화랑을 빌려서 전시했다. ‘평면으로 생각할 수 없고 부조로도 생각할 수 없는, 도자기도 아니고 평면 회화도 아닌’ 오묘한 경계의 상태로 존재하는 2.5차원. 이것이 작가의 의도대로 정확히 표현되고 창조된 파격적이고도 정교한 현대 미술 작품에 2013년 지구 곳곳의 미술계가 들썩였다.
조선 백자를 위주로 전시한 2013년 개인전과는 달리 2011년 개인전에서는 섬세한 색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청잣빛 달항아리 시리즈도 선보였다. 이 네모난 도자는 1340℃의 고온에서 한 번에 굽는다.
예상을 넘은 예상 2 30년째 사발만 나르는 사람이 있어요!
미술계를 전율시킨 이 남자는 6년 전 자신은 늘 2할이 부족하다고 한숨 쉬며 슬며시 중원에서 사라진 작가 이승희 씨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중국 최고의 도자기 산지인 징더전에 갔다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긴 세월 동안 각기 한 분야만 연마하며 쌓은 무공이 한데 모인 구식 세계에 말문을 잃었다. 도시의 역사가, 사람이, 현재가 오직 도자기 제작을 위해 존재하니, ‘이 무서운 사람들을 어쩌나’ 하고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철저한 세분화와 분업을 하는 기상천외한 장인들의 도시 징더전. “그곳을 보는 순간 ‘이젠 도자기와 현대 미술이 평등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태 상상만 했지 실현은 엄두를 못 내던, 흙이 현대 미술이 되는 작업이 아날로그적이고 장인적인 그곳에선 가능할 것 같았어요.”시간이 멈춘 듯 지저분한 징더전의 거리에선 작은 가게마다 신선 같은 프로페셔널이 있다. 이곳에선 짐꾼마저 프로다.
작은 도자기만 나르는 짐꾼, 큰 도자기만 나르는 짐꾼으로 세분화되어 평생 그 일만 한다. 길바닥 돌부리 지도를 GPS보다 세밀히 알아채는 작은 몸집에 커다란 작품을 이고도 가랑비에 비 피하는 듯 절묘한 몸놀림으로 도자기를 옮기는 기이한 장면. 그야말로 징더전엔 도자기의 신선들이 다 모여 있었다. 세계의 작가들은 징더전에 찾아와 각 분야 장인들의 울트라 내공을 빌려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실재로 구현한다. 중국어를 모르고 지리도 모르는 이승희 작가는 처음 6개월간은 징더전의 이 놀라운 시스템을 채집하러 다녔다. 그 후 2~3년은 상상 속 모든 것을 실제로 구현해보는 데 바쳤다. 징더전엔 한 번에 40장씩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가 50개가 넘으니 한국이라면 1년에 한 번씩 할 실험을 그곳에서는 3백 회도 넘게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실험이 기록이 되고 실력이 되고 드디어 실존이 되자, 작가가 그간 체득한 데이터로 빚고 그린 정확하고 세밀한 작품이 가마에서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1 흙판을 평평하게 만든 뒤 이미지 부분에 옅은 흙물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기를 70여 회 반복하면 3mm 두께가 된다. 건조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두 달. 호림미술관 소장 유물 도자기를 재현했다.
2 바탕이 되는 흙판에는 유약을 칠하지 않아 친근한 종이 질감이 느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지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관 소장 작품인 유물을 재현해 그린 후 유약을 칠해 빛에 반사되도록 했다.
예상을 넘은 예상 3 이토록 치밀하고 세심한 현대 미술이라니!
“징더전에서 보낸 시간은 내가 반전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낀 2할의 현대 미술 감각, 바로 그것이 동양인인 나의 정체성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 2할을 키우자, 동양적인 작업을 시작하자. 그랬더니 그제야 내 작업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겠더군요.” 지인도 정보도 없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남자. 그래서 그는 수십 가지 채도가 살아 있는 청화부터 갖가지 유약, 손으로 만든 놀라운 도구들까지 징더전의 수많은 작가적 요소를 경험해본 후 그 결과인 데이터값을 그만의 기호로 표기하는 작업 지도를 만들어 그의 세포에 새겨 넣었다. 1cm씩 늘려가는 오랜 시도 끝에 휘지 않는 평면의 도자기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위에 가는 펜으로 고려나 조선 시대의 연적, 청화백자, 달항아리 등 책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현존 유물과 똑같은 형태의 미세한 경계선을 만든다. 그 형태 위에만 여린 흙물을 칠하고 말리고 또 칠하기를 60~70회 반복한다. 그리고 작가가 체득한 수치대로 도자기가 미세한 두께로 솟아오른다. 그러면 또다시 마치 등고선을 그리듯 미세한 수치로 가장자리를 여러 번 깎고 다듬는다. 성형부터 채색과 유약 칠하기까지 미세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이 작업의 과정은 글로 형용하기 어렵다. 또한 이 평면 도자기를 박물관에 있는 실재 도자기와 비교해보도록 이승희 작가가 직접 유명 갤러리의 도자기 작품을 모사해 채색한다. 수십 가지 청화를 사용해 수십 개의 단위로 끊어 3D 각도 그대로의 그림을 2D에 가까운 면에 옮긴 기막힌 정교함이 놀랍고, 모필화와 진품이 다를 바 없는 섬세한 모핑법에 또 한 번 감탄한다.
세 가지 유물을 한 작품에 재현했다. 각 도자기의 색상, 형태, 제작 기법이 다르므로 그 멋 또한 감칠맛이 난다. 도자기의 양각과 음각을 드러내기 위해 티끌 높이라 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로 작가는 조각을 했다. 때로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양각과 음각이 눈을 감고 손으로 만져봤을 때 느껴진다.
유약을 바를 때도 평면에 가까운 입체의 각 면에 여러 가지 유약을 수차례 교차해 바르면서 입체 도자기가 빛과 만나 만들어내는 은근한 입체감을 평면에 고취시킨다. 게다가 유약을 칠한 부분이 빛을 드러낼수록 바탕을 이룬 평면의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처음 상태의 까슬한 촉감도 살아난다. 두 영역이 모두 흙으로 빚은 도자기인데도 바탕이 천으로 만든 캔버스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것은 한 평면 위에서 작가가 의도한 두 개의 빛과 질감이 서로 상생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지면으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는 첩첩산중의 작업으로 도자기가 평면 작품으로 완성되는 데는 이처럼 기행에 가까운 고행이 수반된다. 이것이 그의 작품 앞에서 일반 관객보다 중원의 고수들이 더 동요하는 이유다. 고수의 눈에도 더 고수로 비치는 그의 이름은, 돌아온 현대 미술 작가 ‘이승희’다.
작품 사진 임장활 취재 협조 L153 Art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