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흡수한 검은색과 모든 것이 시작되는 흰색의 여백 위에 부피와 움직임을 힌트처럼 드러낸 옷이 놓였다. 정확히 말하면 걸려 있다. 조금 뒤로 걸어가서 보고 조금 앞으로 다가서서 본다. “가까이서 보니 여백이 아니라 옷장이네. 그럼 옷에 투영된 빛은 실제고 옷장은 가짜인가? 여러 점이 함께 걸린 작품은 마치 옷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하군. 누구의 옷일까? 같은 디자이너가 만들었을까, 서로 다른 옷일까?” 동양적이기도 하고 서양적이기도 한, 옷장 속에 옷이 걸린 오상택 작가의 작품은 묘한 느낌이다. 구상과 추상, 감상과 추론 사이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눈으로 와서 가슴으로 갔다가 조금 더 숙성된 후에야 머리로 올라갑니다. 그때 논리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가르치는 한 학생에게 ‘네 작품 앞에서 사람들이 5초 이상 서 있지 않으면 논리는 필요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제 경우는 그동안의 작품 시리즈를 관통하는 논리와 방법이라는 집이 이미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논다는 건 가장 잘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와 통한다. 세 가지 시리즈를 통해 ‘사는 이야기’를 해온 작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나이가 들자,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속에 본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얹어야 비로소 생명력 있는 ‘사는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외국에서 서양 미술 기법을 익혔지만 본디 몸속에 든 건 동양의 정서. 잘 하는 것을 불러내니 평면적 구성, 공간에 대한 인식, 여백이 나왔다. 예술가 대부분이 그렇듯 그도 꼬마 때부터 멋 내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외적인 치장에 끌린다. 그러니 옷, 그중에서도 명품을 오브제로 선택한 건 그의 본능이다. 마치 조선시대 선비들이 책가도라는 세련된 방식으로 ‘나 이런 책 읽는 사람이오’라고 웅변한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명품 옷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특히 남자의 슈트는 생필품이라는 본연의 기능에서 벗어나 일종의 사회 권력처럼 인식ㆍ상징되는 실제와 반실제의 ‘사는 이야기’와도 연결되었다. 반면, 우연히 진태옥 디자이너의 옷을 통해 그의 프레임에 등장한 여자 옷은 작가에게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끄집어냈다. 언젠가부터 옷이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롭게 놀다가 주인이 들어오면 아무 일도 없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난감 인형처럼 용도가 다른 옷들이 옷장에 모여 사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았죠. 옷을 보면 제 머릿속에 이야기가 팝업됩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 장면, 무대를 끝내고 들어오는 배우 같은 특유의 내러티브가 생기지요.”
85F4, 150x90cm, photographic color print on canvas, 2013
과거의 책가도 같은 확대 원근법을 사용하고, 사진을 캔버스에 프린트해 회화 작품으로 착각을 일으키고, 시각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실제 옷 사이즈보다 10% 큰 생경한 부피감으로 연출하고, 작품명‘(un) Necessaries’처럼 쉽게 가지기 어렵지만 무리하면 가질 수도 있는 명품 옷의 사회적 의미를 표현했다는 건 기계적 답변. 대신, 작가는 이 작업에 남은 여전히 많은 가능성과 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논리란 작가가 다음 작업 단계로 가기 위해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자 기록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니까. 사진이 급격히 대중화된 시대, 관객이 ‘사진이 이런 식으로도 확장될 수 있구나’ ‘신기하다’ 라고 느끼면서 사진 작품의 사회적 의미나 기능을 가슴으로 깨달은 후 작가의 논리가 전해져도 좋겠다. 작가에게나 관객에게나 가장 좋은 것은 눈으로 들이고 가슴에서 숙성한 후에야 머리에 이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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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택 작가는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시카고 예술대학교의 사진과 학부와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교 사진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삶에서 깨닫는 인생의 모순 이나 간극을 표현한 ‘프로세스’ ‘시티 로맨스’ ‘스포츠’ 등의 시리즈의 작품을 선보였다. 2005년 처음으로 ‘옷’을 오브제로 등장시켰으며,12월 20일까지 신사동 예화랑에서 이라는 개인전을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