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지은 작은 집, 단정하게 칠한 깔끔한 벽, 건강한 몸매에 머리카락을 묶은 발랄한 소녀. 범인凡人의 식견으로 추정하건대, 소녀의 행복을 저해할 마땅한 요소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매의 눈으로 보는 다른 관객은 이 섣부른 결론에 반기를 든다. 마치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의 명탐정 셜록 홈스처럼, 액자 속에 존재하는 의문의 단서를 포착해낸다. 쪼개진 나무를 결합한 일체감 없는 벽면의 집, 뛰어오르는 소녀의 등은 줄로 연결되었다. 식탁 밑에 웅크린, 해체된 나무 울타리 속에서 춤추는 소녀를 붙잡는 범인犯人은 ‘슬픔’이라는 가설이 세워진다. 소녀는 정말 슬펐을까, 행복했을까.
뉴욕 ARPNY의 레지던시에 초대되어 1년간 작업에 몰두하다 이제 막 한국으로 돌아온 오제훈 작가. 2006년 첫 개인전 이후 그의 작품 활동은 순항했다. 석사 청구전 이후 KTF의 공모에 당선돼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금호미술관에 초대돼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으니, 전도 유망한 젊은 작가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이력이 이어졌다. 그런데 버려진 나무와 철을 주워다 새로운 공간을 꾸미는 설치 작업을 주로 하던 3~4년 전,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다. 작가로서 책임감이 마음을 짓눌렀고 개인적 어려움에 마음이 짓이겨졌다. 작업실에 앉아 있지도 못할 만큼 괴로운 나날 속에 어느 날 문득, 작업실의 동료가 한겨울 친구에게 줄 선물을 뜨개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스한 마음을 담은 따뜻한 털실. 조각을 전공해 회화 작업에 익숙하지 않았는데도 이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치 그림일기처럼 그림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는 듯.
‘Dear J’, 30×43cm, 혼합 재료, 2013
2013년 ARPNY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포트폴리오를 보내 입주 작가로 선정되면서 털실로 표현하던 그의 그림일기에 사진과 입체물이 함께 등장하는 네모난 액자 틀이 더해졌다. 뉴욕에서 보낸 1년은 마음에 쌓인 많은 짐을 내려놓으라는 축복 같은 시간이었다.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아침부터 새벽 1~2시까지 오직 작업에만 매달렸다. 헝클어지고 덩어리진 마음을 작품으로 풀어내며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우연히 가본 건축 자재점에서 샘플로 나눠주는 나무 질감의 이미테이션 장판과 만나면서 작품에 새로운 사유가 더해졌다. 나무로 보이지만 나무가 아닌 이것처럼 진짜로 포장된 가짜가 우리 주변에 포진해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놀라지않을 만큼 무신경해진 건 아닐까. 가짜를 가짜라고 구별하는 대신 이상하지않다고 생각하는 인식적 수용, 어쩌면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방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 단서가 되었다.
사실 뛰어오르는 소녀는 두 명이다. 오제훈 씨와 그를 촬영하러 온 친구가 같은 옷을 입고 번갈아 뛰었다. 연작으로 걸린 여러 액자 중 누가 그이고 누가 친구일까? 목조 주택이나 겹겹이 쌓인 의자가 된 건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닮은 장판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무라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러나 실제로는 모방품에 불과한 나무 장판. “외형으로 보이는 진짜 같음과 그것의 원본인 진짜의 물성에 대한 혼동을 부추기는 것, 그 속에서 발생되는 모호한 가치 체계를 인식해 진실을 보라고 권하는 것이죠.” 예전 작품엔 손이나 발 등 작가 자신의 단절된 신체 부위가 드러났지만, 최근 작품에는 뛰고 움직이는 그의 전신이 등장한다. 작가도 인식하지 못한 이 변화를 첫 번째 전시부터 매서운 눈으로 관찰해온 관객이 최근 알려준 것 이다. 웅크린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 내용은 무겁지만 직관에는 위트있게.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적 진정성을 되찾은 소녀는 진짜 행복을 향해 뛰어오른다.진실에 관한 실오라기 같은 단서를 여전히 관객의 눈앞에 남겨둔 채.
‘Dear J’, 43×30cm, 혼합 재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