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한 마리가 긴 몸뚱이를 먹색 기둥에 친친 감고 제 꼬리를 문 잉어를 아끼듯, 탐내듯 어르고 구슬린다. 치날리는 수염발로 겨누었다가, 개벽의 입김을 내뿜었다가 하는 용 한 마리. 곧 용틀임하며 영겁의 하늘로 승천할 태세다. 임진년壬辰年 용띠 해 첫 <행복>의 표지 작품인 ‘책거리 문자도 8폭-충忠’은 이렇게 기찬 그림이다. “어변성룡漁變成龍이라는 설화가 있어요. 해마다 복숭아꽃이 물위를 흐르는 봄이 되면 황하강 상류 용문협곡龍門峽谷에 뭇 잉어들이 몰려들어 급류를 다투어 뛰어오르는데, 이때 성공적으로 뛰어넘은 놈이 용이 된다는 이야기죠(<후한서> 중 ‘이응전’). 그래서 옛사람들은 선비가 과거 시험에 합격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걸 잉어의 등용문登龍門에 비유했답니다. 이번 표지가 ‘충忠’자 그림인데, 그건 바로 높은 관직에 오르면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죠.” 정성옥 씨의 이 자분자분한 설명 속엔 갈피마다 이야기가 하나씩 숨어 있다.
먼저 용 이야길 해볼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라. 용은 사슴의 뿔, 소의 귀,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의 발바닥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아홉 동물을 닮았다. 하지만 용은 열두 띠 중에서 유일하게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다. 이 용이란 존재는 서로 다른 짐승을 한 몸에 섞어놓았는데도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조화의 결정체’ ‘덕의 상징’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게다가 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하면서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 하니, 이보다 신통방통한 존재가 없다. 이어령 선생은 한ㆍ중ㆍ일 비교 문화 시리즈 중 하나인 <십이지전 용>에서 용에게 이렇듯 영화로운 뜻을 안겨주었다. “지식 정보사회를 이끄는 힘은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용과 같은 힘, 바로 하이브리드, 크로스오버, 퓨전, 컨버전스, 매시업, 인터랙티브 등일 것이다. 서로 섞이고 융합하는 놀라운 통합의 시대, 용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다.” 이 절묘한 표현을 듣고 여러분은 무릎을 칠 게 분명하다.
꿈을 문 용
“제 그림에서 용은 고난 속에서도 도전하는 존재죠. 한 마리 잉어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거센 물살을 뚫은 뒤 용문을 지나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된다는 것. 근사한 꿈 아닌가요? 이 용 그림엔 내 꿈도, 자라나는 아이들 꿈도, 또 다른 누군가의 꿈도 담겨 있겠죠.” 정성옥 씨의 용 그림엔 아롱다롱한 여자의 일상과 꿈이 들어 있다.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 일하다 살뜰한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 셋 키우느라 기운도 빼며 ‘집사람’으로 살던 어느 날, 그는 민화를 만났다. 그 ‘유치찬란한’ 오방색 그림을 보자 어릴 적 한옥 벽장문에서 본 꽃과 나비가 노니는 화조화가 떠올랐고, 가슴이 요동쳤다. 사물놀이 한판처럼 자신도 모르게 둥당덩 리듬을 탔다. 그러고는 문화센터에서 민화 전수자 최덕례 선생에게, 궁중화연구소의 윤인수 선생에게 사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부이기도 했던 그는 아침마다 남편과 아이를 일상의 전장으로 내보내고 나면 아무런 요구도, 책임감도, 산만함도 없는 식탁에서 민화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처음엔 사춘기의 질풍노도에 휘둘리는 아이들이 잘 버텨주기를, 대학 입시를 앞둔 두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거리를 그렸어요. 민화는 원래 염원을 꾹꾹 새겨 담은 솔직한 그림이잖아요. 조선시대 아낙이 “남편이 출세할 수 있는 그림 좀 그려주세요”라고 주문하면 그림쟁이는 관직 등용을 뜻하는 공작 깃털, 과거 급제를 상징하는 살구꽃 등을 그려 넣는 ‘염원의 그림’이었다죠. 당시 제게 민화는 어떤 종교적 믿음 같은 역할을 했어요.” 골몰히 연구하고 곰바지런하게 그리다 보니 점점 염원의 그림은 색의 향연, 의미의 향연을 담은 그림으로 옮겨갔다. 어느 때부턴가 그는 책거리 그림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는 평을 얻은 민화 작가로 자리매김 했다. 어떤가, 이 사람의 꿈. 풍설의 시새움을 다 견뎌내고 뜨거운 빛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꿈, 정성옥 씨도, 우리도 꿀 만 하지 않은가.
용 그림에 숨은 또 하나의 비밀
그림을 좀 더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땅속 보화처럼 숨어 있다. “충忠 자의 ‘中’ 부분에는 용과 잉어가 있잖아요. 그런데 잉어가 용의 꼬리를 물고 있는 꼴이에요. ‘心’ 부분은 새우와 대합이 획을 대신해 좌우로 나란히 그려져 있고요. 여기에 숨은 상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화합’이에요. 새우 ‘하蝦’의 발음이 ‘화和’의 발음과 비슷하고, 대합 ‘합盒’의 발음이 ‘합合’의 발음과 같은 데서 비롯된 상징이죠. ‘충’ 자 그림에 화합의 뜻을 왜 넣었냐 하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으로 군신君臣 간에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단단한 껍질로 싸인 대합과 새우처럼 굳은 지조를 지닌 것이 충절의 요건이라는 뜻도 담겨 있고요.” 이토록 간간한 재미가 가득한 우리 민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라고 해야 정답인 우리 민화!
용띠 해, 비상하는 용처럼
한 해의 첫머리, 삿된 것을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현실의 소망을 담은 이 고아한 그림을 집 안에 두면 그 기운만으로도 가족이 기세등등해지지 않을까? 게다가 상서로움을 예견하고 세상을 지혜롭게 돌보는 신성한 존재, 용이 담긴 그림이니 임진년 한 해 가내 무탈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여의주를 물고 비상하는 용처럼 용띠 해에 우리가 꾸는 꿈은 한층 드높아지지 않을까? 이게 바로 <행복>과 정성옥 작가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새해 선물!
(왼쪽) 이번 표지 작품인 ‘책거리 문자도 8폭-충忠 ’, 순지에 분채, 112×34cm
정성옥 씨는 책거리 그림에서 최고라 인정받는 작가로 첫 개인전 <소망이 깃든 책거리>(2006년) 이후 주목받고 있다. 2007년 10월호 <행복> 표지 작가로 선정, 책거리 그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에서는 강약 조절이 돋보이는 선, 자연과 기물의 본디 형태와 색깔에 자신의 직관을 보탠 개성이 엿보인다. 2011년 9월 2회 개인전 <책들의 정원>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