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별들이 내려앉을 수 있는 멍석을 깔아두고, 알밤 톡 튀어오르는 화로 피우고는 등 삭삭 긁어주며 옛이야기 풀어놓던 할머니. 떨어진 별똥 이야기는 수백 번 들어도 물리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땅의 별들, 그 어여쁜 계집아이ㆍ사내놈들 머리 위로 별똥이 왔다 갔다 했다. 할머니의 감청색 치마폭 같은 아늑한 하늘 덮고 옛이야기 듣노라면 소록소록 겨울잠이 쏟아져내렸다.
<행복> 12월호 표지 작품인 ‘춤. 하늘 42-4’를 보고 이토록 평화로운 정경을 추억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새와 나무, 꽃과 나비, 물고기와 거북이, 집과 구름이 어우러진 이 동화 같은 장면은 자꾸만 우리 마음을 과거로, 과거로 데려간다. “나이가 들수록 그 기억이 점점 내 마음을 점령해버리는 겁니다. 별들은 기적인 양 아주 선연하고, 모깃불이든 화롯불이든 하얀 불들이 자꾸 하늘로 비상하는 것 같았지요. 그때 나는 춤을 본 것 같습니다.
하늘과 별, ‘쏴아아’ 하고 흔들리는 나무, 꽃, 나비, 옛날이야기 그리고 나까지 하나 되어 추는 춤을 본 것 같아요.” 지상과 천상이 어우러진 생명의 춤을 본 그는 ‘무천舞天(원래의 뜻은 상고시대 때 음력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즐긴 제천의식)’ 시리즈, ‘춤. 하늘’ 시리즈, ‘상생’ 시리즈를 그렸다. “물리학에서 보면 사물은 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그 진동이 춤이지요. 그렇다면 세상 만물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춤인 겁니다. 생명체가 우주와 어우러져 공명하고 춤추는 것, 그렇게 서로 어울려 춤추다 보면 뭇 생명들이 뒤섞여 일가를 이루게 되는 것. 그런 이야기를 그림에서 하고 싶습니다.” 후두둑 북 울림 같은 우주의 몸부림에 보는 이의 마음도 진동한다. 사람 하나 없는 그림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까지 흔든다.
(오른쪽) ‘춤. 하늘 40-2’, 목천 위에 수간 채색, 116×80cm, 2007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은 고대 신화나 설화의 한 대목 같기도, 하늘에 제의의 뜻을 전한 원시 벽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상고시대의 무천 의식은 곧 축제지요. 갈등하고 치대기보다는 ‘세상을 축제의 밤처럼 살아가는 게 어떤가’ ‘사랑하고 돕고 춤추며 살아보지 않겠는가’ 그런 뜻도 그림에 담겨 있어요. 또 이 땅에서 처음으로 생의 자락을 펼친 이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별과 달, 꽃, 나무, 뭇 생명체를 21세기의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도 싶었습니다. 바로 축복처럼.”
시리도록 푸른 날에
이번 표지 작품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라. 파란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푸른 대기를 뚫고 별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청각적이고(그의 어떤 작품에선 새가 연밥을 쪼기도 하는데, 그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릴 것만 같다), 촉각적이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그림의 대부분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투성이다. 그저 파란 게 아니라 투명하게 파랗다. 누군가는 그 파란빛을 ‘대낮이 밤으로 바뀌는 기적 같은 순간의 파르스름한 빛’이라고도, 또 누군가는 ‘새벽이 되어 세상이 다시 깨어날 때 하늘을 뒤덮은 푸른빛’이라고도 한다.
“나만의 푸른색, 기존의 물감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푸른색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애쓰고 연구했습니다. 캔버스 위에 동양화에 쓰는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하고, 어느 땐 일부러 두껍게 바탕을 칠한 다음 긁어내기도 하면서요. 어떨 땐 회칠한 벽면처럼, 또 어떨 땐 대리석처럼 반들거리게 표현하고요.” 이렇게 푸른 바탕 위에서 빛이 투사되어 나오듯 환하게 자리한 별, 나무, 동물, 식물….
(오른쪽) ‘A walk 44-11’, 목천 위에 수간 채색, 53×53cm, 2010
표지 작품을 다시 한 번 무연憮然하게 들여다보라. 푸른 바탕의 한가운데 초록 나무가 있다. 시리도록 푸른 겨울날, 무성한 잎들 다 떨구고 추위에 물기 빨아올릴 힘마저 거둔 채 힘겨운 겨울나무지만 그 속에는 새 생명의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무서운 힘으로 움이 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별과 구름, 꽃과 새가 벗이 되어 겨울나무를 북돋운다. 우주의 봄 에너지가 세상 구석 구석 파고들어 모든 생명이 너울너울 춤추길 바라며. 우리의 12월에 그가 보내는 푸른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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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남철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궁 옛터에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철농 이기우 선생에게 서예와 전각을 사사했고, 20여 회의 개인전과 2백여 회의 초대전, 기획전에 참가했다. 현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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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황승희 취재 협조 문화인아츠(02-554-6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