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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유선태 씨 예술의 숲으로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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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때는 늘 짧아서 사랑도 짧고, 꽃 피는 시절도 짧고, 점심시간도 짧네요.” 라일락 향이 창을 기웃거리는 날이면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저릿저릿한 연서 한 장 쓰고 싶다. 수신인란에 낯선 이름을 달아도, 아니 이름이 없어도 좋다. 한 귀퉁이에 날개처럼 우표까지 붙어 있으니, 저것만 있으면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날아갈 수 있겠지. 훌쩍 마음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 6월호 <행복> 표지 작품인 ‘말과 글-신미인도’를 보며 이렇게 아련한 상상을 보탠 건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편지를 ‘띄운다는’ 것, 그건 잠시 내 마음을 누군가의 곁으로 훌쩍 여행 보내는 것일 테니.
“요즘 제 그림에 한결같이 보이는 자전거가 그 여행의 메타포지요. 어렸을 때 내 손으로 닭 키워서 장만한 그 자전거만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생각은 여전히 진행형이고요. 어쩌면 제 삶 자체는 끊임없이 호기심을 찾아나서는 여행이었을 거예요. 파리로, 독일로 다시 한국으로 옮겨 다니며 산 것이 그러했고, 평생 예술에서 얻으려 한 것도 그것이었고. 그래서 이 자전거 탄 사람은 제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한데 이 자전거를 타고 옮겨 다니는 시공간의 차원이 참 여러 모습이라는 겁니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다빈치의 모나리자, 바로 동양과 서양, 또 편지라는 일상과 명화라는 예술, 과거와 현재, 이 작품에선 쉽게 안 느껴지지만 다른 작품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입체와 평면 같은 거죠. 그 시공간을 넘나들고 싶은 제 자아가 자전거 탄 사람에게 담긴 겁니다. 무엇보다 좋은 작가들이 만든(이 작품에선 다빈치와 모나리자) 예술이라는 숲을 자전거 타고 여행하면서 느끼고, 재구성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 그런 상상이 들어 있죠. 이 그림에선 옷을 바꿔 입은 모나리자와 조선 미인이 제 나름의 재구성이겠지요.”
(왼쪽) 유선태, ‘말과 글-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218.2×290.9cm, 2011
5월 29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 작품들에는 칸딘스키, 달리, 마그리트, 강희안, 정선 등의 명작이 화 면 속에 함께한다. 그런가 하면 그 명화들 옆에 주 전자, 축음기, 항아리 같은 낯익은 세간도 눈에 띈다. “그래서 제 작품은 초현실주의적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자전거, 우표, 사과처럼 현실의 사물이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 공간이니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예술의 숲과 일상의 숲, 과거와 현재의 숲, 동양과 서양을 자전거 타고 쏘다니는 유목 遊牧의 정신?” 자분자분한 설명을 들으니 그의 그림은 들여 다볼수록 보는 재미, 읽는 재미가 있다.
“지금 사진 찍고 있는 제 뒤로 보이는 작품에서는 자전거 탄 사람이 액자 속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그 사람은 현실의 공간에서 액자 속 2차원 공간속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이것도 초현실주의라고하면 안 돼요. 현실을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거든요. 대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모습이라 할까요? 비유하자면 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은 겁니다. 물이 시간이고 배가 나 자신이라고 한다면 방금 지나쳐온 배 뒷부분의 물이 과거이고, 배 앞부분의 물은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 그림은 물 위에 떠 있는 그 배와 같은 상황일 뿐이죠. 하하, 너무 어렵나요?” 어렵다. 한 예술가가 수십 년을 바쳐, 오랜 공력을 들여 창조한 세계를 어찌 이 터럭 같은 시간에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왼쪽) 유선태, ‘말과 글-오브제의 숲’,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2011
(오른쪽) 유선태, ‘말과 글-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2011
그의 그림을 사진이 아닌 실제 작품으로, 찬찬히 공들여 살피면 한 가지 보물 같은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전면에 ‘말’ ‘글’이라는 글씨가 빼곡히 써 있다. 멀리서 보거나 지금처럼 작은 사진으로 보면 보이질 않는다. 가까이서 봐도 언뜻 보면 금이 간 것으로 보인다. “동양화 기법 중에 준법 峻法이라는 게 있어요. 산이나 돌에 주름을 그려서 입체감·양감을 드러내는 동양적 음영법이죠. 이 준법처럼 저는 말과 글이라는 글씨를 미세하게 그려 넣은 겁니다(이번 그의 개인전 제목은 <말과 글-자전거 타는 사람: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다>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서양화에 동양적인 준법을 도입한 건데요. 이건 내가 서양화나 동양화라는 틀에 갇히지 않기를, 더 나아가 회화와 오브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나게 ‘유목’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제 그림 속엔 조각이 존재하고, 또 제 조각 작품 속에 그림이 들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죠.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조각 중에 ‘말과 글-그림 상자’를 직접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될 겁니다. 유성기 모양의 조각품 뚜껑을 열면 그 안에 회화 작품 서너 개가 꽂혀 있는 형식이지요.” 이 기사를 읽은 후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다. 진귀한 그림 구경, 참 잘했다. 다 보고 나니 정말 훌쩍 떠나고 싶다. 이른 아침 엷은 햇살 무장한 채 자전거를 타고. 그게 예술의 숲이든, 진짜 숲이든 어디라도 좋겠다. 이토록 행복한 도취를 안겨주는 인생이라는 여행, 예술이라는 여행! 떠나지 못한다면 주소 없는 편지라도 누군가에게 ‘띄우고’ 싶다.화가 유선태 씨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파리국립8대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갤러리 라빈 Gallery Lavignes(파리), Gallery K, 호안나 쿤스트만 Joanna Kunstmann(스페인), 베라 반 라에 Vera van Laer(벨기에), 가나화랑(서울, 뉴욕) 등에서 4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파리와 장흥 가나 아틀리에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그의 개인전 <말과 글-자전거 타는 사람: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5월 29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6월 15일부터 7월 10일까지 부산 가나화랑에서 열린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