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방금 까놓은 귤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그의 ‘조각 회화’ 안으로 스며든다. 빛을 받고 나서야 그 작품은 옅은 그림자를 만들며 3차원 입체라는 제 속내를 드러낸다. 조각이라고 하기엔 평면적이고(부조처럼 한 방향에서만 보이므로), 회화라 하기엔 입체적이어서 그림인지 조각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의 작품. 그는 이것을 ‘조각 회화’라 부른다. “내가 만드는 세계는 내가 만져보지 않는 한 평면입니다. 한 각도에서만 ‘봐도’ 실체가 보이므로 평면이고 회화지요. 만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조각처럼 3차원 입체라는 걸 알게 되니 ‘조각 회화’ 라고 부르는 게 적당할 것 같네요.” 이상 시대의 마지막 시인 같은 얼굴로 그가 설명하는 차원 이론 그리고 회화론.
원래 그는 종이 위에 콩테로 일상의 물건을 그렸다. 최소한의 것으로만 이루어진(거의 무채색이거나 색을 쓰더라도 제한적인 색채위주라든지, 최소한의 형태만 남기고 단순화한다든지 하는) 그의 드로잉은 일견 수묵화 같기도 했다. “난 미술을 미술이게 하는 작가의 직관과 관객의 찰나적 감상에 관심이 있기에 나의 드로잉이 최소한의 것들로만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그의 글에서 그뜻을 조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공주의 작은 농업 창고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좀다르고, 남다른’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평면에 물리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평평한 나무판을 파고 깎아낸 후 색을 덧입히는 조각회화를 시작한 것이다. “도시에 살았다면 아마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는지도 몰라요.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마음으로 스케치 없이, 설계도 없이 나무와 내가 놀다 보니 어느새 형상이 만들어지고 형식이 드러나더라고요. 하지만 최소한의 형태와 핵심적인 인상만 전달하는 것이 회화의 본질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내 조각 회화가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형태만 담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죠.” 회화에 대해 그가 갖는 생각은 최근에 연 조각 회화 개인전 제목 <회화의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연이 가져다준 쾌 快 그의 조각 회화 안에는 물고기가 그려진 탁자, 화초, 물뿌리개 같은 일상의 물건이 그림처럼,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그 물건들은 모두 숫되고 후한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목인 木人(나무로 만든 사람 형상)이나 상여 장식처럼 투박하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익숙한 무언가를 볼 때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시각에 촉각까지 동원해 조각 회화를 ‘몸으로’ 느낀 결과다. 그는 스케치 같은 준비 작업 없이 곧바로 나무를 깎고 색을 칠한다. 무엇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계획하는 대신 손과 마음이 가는 대로 직관에 의해 깎고, 파고, 칠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우연에 그는 기뻐한다. 예를 들면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 형태에 나무를 덧대자 의자가 붕대를 감은 것 같아 한순간 쾌를 느낀다. 그는 그 우연이 주는 쾌를 사랑한다. “우연이 뭔가요? 사물과 사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미묘한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삶도 우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나요? 조각 작업으로 넘어오면서 그 우연의 묘미, 의외성의 묘미를 느꼈어요. 드로잉이 쌓는 작업이라면 조각 회화는 잘라내고 버리는 작업이거든요. 회화 작업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처럼 종이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이 위에서 ‘나’는 겉돌죠. 하지만 조각 회화는 일단 몸을 부리며 느끼는 쾌가 있어요. 또 형태와 형태, 원색과 원색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파열음이 재미있어요. 무엇을 그리거나만들려 하지 않을수록그 무엇인가가 그려지고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미술 서적만 빼고 인문학 책, 사회과학 서적, 시집처럼 ‘내가 몰랐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책을 좋아한다는, 이 사색적인 예술가. 그의 오래 묵고 곰삭은 대답이다.
1 ‘무제’, 나무에 아크릴, 2010
2 ‘무제’, 종이에 콩테, 2006세상의 틈을 본다는 것 조각도, 회화도 아닌,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 묘한 작품으로 그가 세상에 말하려는 건 뭘까? 예술이 삶에 섬광 같은 순간을 주리라 확신하는 걸까? “예술이 별거는 아니지요. 매일 나무가 자라고 구름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는 걸 보면 예술이 별거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사랑, 배려… 이런 것에서 사람들은 실체를 못느끼지만 그 실체 없는 것들이 사람의 생을 풍요롭게 만들 듯, 계량할 수 없는 것들이 삶에 주는 에너지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의 언저리에 예술이 있는 것 같아요. 아니면 그것들의 파편일 수도 있고요. 세계의 다른 층위를 보여주는 거죠. 내 조각 회화가 그 다른층위를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감사하죠.” 그는 그 건조한 목소리로 예술의 가치라는 후렴구를 읊고 있었다.
그는 요즘 ‘남다른’ 작업 하나를 보태고 있다. 조각 회화보다는 판화에 좀 더 가까운 작업인데, 나무판 위에 형태를 새겨 넣고 원색을 덧칠한다. 새 대가리와 사람 머리가 붙어 있는가 하면, 두상 주위로 후광이 비친다. 눈이 서너 개 달려 있고 머리엔 왕관을 쓴 이 형상은 괴물 같기도, 신상 같기도 하다. 가끔 이런 작품엔 금빛 액자를 두르기도 한다. 시장실벽에 도열한 사진 액자처럼 이 금빛 액자 작품을 줄 세워 설치하기도 한다. “다른 작업처럼 여기에도 큰 의미를 심지는 않아요. 그저 사람을 비추는 작업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전쟁의 시대에 낭만만 이야기하는 예술이 바람직한가 하는 고민이 가끔 들어서요.
요즘 인류라는 종족에대한 회의가 들기 때문에 그런 내 고민을 ‘아주 조금 더’ 이야기하게 된 것뿐이죠. 세상의 틈을 본다는 의미죠.” 눈썰미 없는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도 없는, 그저 조각이나 공예 작품쯤으로 생각할 그의 작품. 그 조각 회화 속에는 우리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눈부시게’ 고요한 그림 속 빛깔을 만들기 위해 이 남자는 말 없는 붓질을 더하는 중이다. 그의 말 없는 붓질을 헤집고 들어온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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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 씨는 1970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충남대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03년 개인전 <이강욱 드로잉전>을 시작으로 2006년 <그것 혹은 그 밖의 것>, 2009년 <이강욱전>, 2010년 <회화의 방식전>을 열었고, 10여 차례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금은 공주의 작은 농업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만의 ‘조각 회화’에 몰두하고있다. ‘세포 그림’으로 유명한 이강욱 화가와는 동명이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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