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련 두 송이가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그림. 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몰아쉬고 싶다. 밥벌이 걱정이며 보기 싫은 내 마음이며 다 잊어버리고, 마음을 쉬고 싶다. 그렇게 한갓진 그림, 평화로운 그림이 이번 표지 작품 ‘연’이다. ‘처염상정 處染常淨(더러움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종자불실 種子不失(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싹을 틔운다)’의 식물, 그리하여 혼례복에 수놓던 영화로운 그 꽃, 연꽃이 종이 위에 만발해 있다. 그 아래로 다산과 다복을 상징하는 잉어가 한가로이 노닌다.
송훈 씨의 식물 세밀화는 글로 치면 수필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 온화하고 담담하다. 한데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잎맥이 하나하나 드러나보일 정도로 이파리 묘사가 치밀하고, 꽃주름이 혈관처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원래 식물 세밀화는 다른 종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의 특징을 정확하게 그려야 하는, 과학과 예술 사이에선 그림이다. 중세 시대 약품에 들어가는 식물을 구분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찍으면 될 일 아니냐고들 묻는데, 카메라 렌즈로는 잎맥이나 솜털까지 잡아낼 수 없어요.
정확성을 위해 식물학자와 생태사진가 같은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야 하는 그림이지요. 똑같아 보이는 식물이라도 마주나기냐 어긋나기냐 돌려나기냐에 따라 구분이 달라지거든요. 공부하지 않고 허투루 그리면 절대 안 되죠. ‘이 이파리는 백련 이파리지, 홍련 이파리가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이도 있는걸요.”
그렇게 공부하며 더 이상 짜낼 게 없을 것처럼 자신을 소진해야 나오는 그림이 식물 세밀화다. 지름 1mm의 원 안에 또 다른 원 다섯개를 그려 넣을 정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그림이다. 자세부터 올곧아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말에 그는 40년 넘게 잡은 낚싯대도 내려놓았고, 50년 동안 피운 담배도 내려놓았다. 하루 8시간씩 돋보기를 쓴 채 눈을 바짝 들이대고, 가는 붓과 숫돌에 간 펜촉으로 세밀화를 그리는데, 워낙 정교한 작업이라 숨도 크게 쉬지 못한다. 선 하나를 제대로 긋기 위해서는 사격 선수처럼 일시에 숨을 멈춰야 한다. 그 때문인지 6년 전엔 심혈관 두 개가 막혀 큰 수술까지 했다. “수술 중 잘못되면 이 세상에 영영 못 돌아올 수 있다고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돌아오지 못하면 못다 그린 내 그림은 어떻게 되나’였어요.
그런 의지 때문인지 큰 수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그 세밀하고 치밀한 세계에 빠져 살고 있다. 가장 조화롭게 생긴 강아지풀을 찾으려고 전국 방방곡곡의 산골을 5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다. 백두산의 자생식물을 살피기 위해 고소공포증을 이겨내고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원래 인물화의 권위자인 김태형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그림을 배웠다. ‘학원사’ ‘민중서관’ 등에서 위인전기와 사전 등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고, 1970년대부터 문교부 한국 동식물도감, 국어대백과사전 등에 동식물 세밀화를 그렸다. ‘세밀화 하면 송훈’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지만, 1980년대 김흥종 선생에게 미인도를 사사하면서 잠시 세밀화를 접었다. 이후 한국화에 몰두하던 그에게 11년 전 한 출판사에서 청을 해왔다.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도감이 없다. 우리 자연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다. 이 작업을 할 사람은 선생님뿐이다”라는 간청이었다. 그렇게 다시 세밀화 작업을 시작해 <우리 식물 세밀화 대도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세밀화> 같은 기록 유산을 펴냈다. 그는 모든 작품을 색이 변하지 않는 아크릴 물감(세밀화는 보통 수채 물감으로 그리는데, 여러 면에서 수채 물감으로 그리는게 편하다)과 수명이 1천 년 이상 간다는 코튼지만 쓴다. 유산을 기록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우리의 자생식물 그림들이 언젠가는 위대한 유산이 되리라 믿는다.
사색의 기운을 담은 기록화그가 그리는 꽃 그림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도드라지지 않는 대신 사색의 기운이 감돈다. 똑같이 식물을 그린 기록화지만 서양의 보태니컬 아트 botanical art가 따라올 수 없는 경지다. 그건 그가 동양화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문인화가 자연을 본떠 그리는 데서 나아가 작가의 심상을 담았듯, 그도 단순히 식물을 본떠 그리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그만의 심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잎에 이슬방울을 더해 새벽바람을, 연잎에 그림자와 벌레 먹은 부분을 더해 삶의 생기를, 연꽃 아래 잉어를 더해 기운생동을 담는 식이다. 박제된 그림이 아니라 담담하게 살아 있는 그림. 무엇보다 그만의 세밀화가 남다른 것은 석채화(돌가루에서 나오는 다양한 색채를 살려 그리는 그림)를 닮은 색감 때문일 것이다. “신륵사의 2백 년 된 단청을 생각해보세요. 세월이 밴 단청 색깔이 왜 아름다우냐면 석채이기 때문이에요.” 오롯이 석채로 그리진 않지만 그의 그림은 석채화처럼 색감에 무게가 있다.
흔히 세밀화는 예순을 넘기면 그리기 힘들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지금 일흔을 넘어서고 있다. 하늘이 사명을 내려준 덕인지 아직 시력도 1.2/1.2로 건강하고, 손 떨림도 거의 없다. 1천여 종의 자생식물 가운데 4백 종을 그렸으니 앞으로 15년 이상은 더 붓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명륜동 작업실에 출근해 하루 8~9시간씩 붓과 펜촉 들고 씨름하는 그의 ‘위대한 유산 만들기’는 이 여름의 끝자락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작품 ‘연’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 여름의 끝자락, 그 그림 속 홍련처럼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말하고 싶어진다. 사는 날은 다 꽃답다고.
(오른쪽) ‘둥근이질풀’, 코튼지 위에 아크릴 물감, 2000
송훈 씨는 1940년 황해도 개성 출생으로, 국정교과서 수록 인물화가인 송원 김태형 선생에게 그림을 사사했다. 도서출판 민중서관 미술부에서 세밀화를 시작해, 세계 명작 위인전기, 전래 동화집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그 후 한국화가 김흥종 선생에게 미인도를 사사한 후 석채화와 미인도를 연구했다. 1996년부터 우리 꽃 세밀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해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우리 식물 세밀화 대도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세밀화> <과일이 좋아>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