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벌레와 공기가 뒤섞인 여름밤의 냄새가 훅 끼쳐와야, 무르익은 과실의 단내가 물씬 풍겨와야 하는데 이 포도 그림은 그렇지 않다. 이 세상 과실이 아닌 것 같은 파란 포도가 그려져 있다. 살아 있던 어느 순간에 화석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리고 그림을 떠도는 사색의 기운. 8월호 표지 작품인 ‘청포도’다.
“사실 제목부터 아이러니하죠. 실제 청포도는 이런 색깔이 아니고, 세상에 이 그림 같은 청색의 포도는 없잖아요. 포도라는 ‘먹을거리’를 그렸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생명체의 거대한 에너지를 그렸다는 게 맞는 말이겠죠. 이것 말고도 이 그림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도를 그린 화판은 그냥 종이가 아니라 광고 포스터예요. 포스터를 손으로 여러 번 문지르고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해 오래된 한지의 느낌처럼 변형한 것이죠. 포스터에 찍힌 이미지나 광고 문구도 일부 남겼어요. 그 광고 포스터가 담았던 시간, 사람들의 자취를 남긴 거죠. 그림을 화판에 고정하기 위해 볼트로 조였는데, 이 볼트 덕분에 실제와 환상 사이의 경계가 생겼다 없어졌다 합니다.” 눈썰미 없는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도 없는 이야기가 가로 3.6m, 세로 2.2m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잘나가는’ 작가였다. 대한민국 대표 미술 대전을 휩쓸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이룩해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이란 뭔가’ 고민하는 밤들, 수류탄 핀처럼 불안해하던 날들이 그에게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자리를 박차고 프랑스 파리로 떠났고, 3년 동안 무감각하게 그리고 지우기만을 거듭했다. 밤새 그림 그리고 아침에 찢어버리는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내가 식탁 위에 올려둔 포도 한 송이를 ‘발견했다’. 정수리에 무언가 내리꽂히는 느낌이었다. 생명체의 거대한 에너지를 그 흔한 포도송이에서 본 것이다. “그 불면의 밤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몰입하다 보니 투명한 말들이, 진실들이 중심에 고요하고 격렬히 쌓인 거죠. 그리고 그게 어느 날 한 줄기 빛처럼 내 정수리를 두드린 겁니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시대라는, 정체성이라는 강박을 벗어버렸다. 대신 세상을, 예술을 망원경으로 내다보는 그림이 됐다. 포도 한 송이의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Flamewer’, 패널 위에 혼합 매체, 122×244cm, 2009현대판 문인화, 21세기 수묵 담채화 그 이후로 그는 포도, 서양배, 꽃, 잡초, 새우처럼 일상의 사물을 그린다. 일필휘지로 힘찬 붓 자국을 남기며, 지우고 다시 그린 흔적을 겹겹이 새긴다. 사물의 세부를 묘사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구상 회화와는 좀 달라 보인다. 굳이 빗대자면 문인화 같다. 자연의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고 정신을 담아 그리는 문인화(유식한 말로 이를 사의 寫意라 한다). 포도의 형태를 과감히 생략하고 단색 위주로 그리는 건 ‘생명의 에너지’라는 주제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재료가 서양의 것인데도 수묵 담채화나 전통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은 이런 이유에서일 테다.
그의 ‘현대판 문인화’는 몇 년 전부터 좀더 달라지고 있다. 똑같은 포도, 잡초를 그리지만 이제는 건축 자재인 아스텔(무광 아크릴) 위에 공업용 자동차 도료(우레탄)로 그린다. 그다음 고딕체로 그림 사이사이에 문자와 숫자 기호를 그려 넣는다. 금속성 도료로 그린 그림은 마치 벽 앞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짝거리는 표피만 남은 그 붓 선은 팝아트적 감수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정신의 무게는 남아 있다. 비유하자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할까. “나는 서양 기법을 쓰지만 그 결과는 전혀 서양적이지 않죠. 하지만 여기서 동양화와 서양화, 전통과 현대, 구상성과 추상성 같은 걸 나누고 싶진 않아요. 삶이든 미술이든 깍둑썰기로 단번에 잘라낼 수 없이 모든 게 섞여 있잖아요. 난 전통을 그림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냥 나를 이루고 있는 게 뭔가 들여다보니 이런 그림이 나온 것뿐이죠. 어쩌면 이게 진짜 전통이 아닐까. 내 몸에 체화되어 있던 걸 자연스레 끄집어내는 것.” 할딱거리며 그의 말을 뒤쫓았는데, 쓰고 보니 정리가 된다.
나도 이제 그의 포도 그림에서 비 냄새와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 꼽꼽한 감상의 물기를 덜어내고 향기로운 정신을 담은 그림. 이 계절, 남녘의 어느 포도원에선 삼복의 햇살에 포도 알갱이들이 향기로이 익어갈 것이다.
이번 표지 작품인 ‘청포도’, 패널 위에 혼합 매체, 220×366cm, 2009
김종학 씨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제1회·2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했고, 동아미술제에서 두 차례 수상했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고, 총 50회가 넘는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열었다. 현재 세종대학교 회화과 교수이자 예체능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