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숙자 씨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원로 화가 천경자 씨의 제자로 1970년대부터 보리밭 그림과 여성 누드를 그렸다. 1980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상,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1981년 국전 추천 작가가 됐다. 서울교육대학과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93년 석주미술상을 수상했다. 2007년 정년 퇴임한 후 일산의 조용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이 그림에선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람이 보리밭을 빗질해 주자, 스르르 스르르 보리 잎사귀들이 술렁이는 소리 들린다. 그 바람결에 뻐꾸기는 제 한 목청 싣는다. 5월호 표지 작품 ‘망초꽃이 있는 청맥’은 그렇게 소리로 먼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 그림에선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보리밭 저 너머’가 상상 속에 보인다. 저 너머에서 님이 곧 오실 것만 같다. 이 그림을 보면 박화목 선생의 아름다운 가곡 ‘보리밭’이 태어난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마음속 아련한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은 30년 넘게 보리밭을 그려 사람들이 ‘보리밭 화가’라고 부르는 이숙자 씨의 작품이다. 서울 사대문 안 토박이인 그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보리밭에 몰두한 건 이런 사연에서다. 가난한 집 11남매의 장남과 결혼해 시할머니와 시부모를 봉양하고 시동생 뒷바라지까지 하던 결혼 초, 경기도 포천의 한 중학교 교사가 된 시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눈앞에 넓은 보리밭이 펼쳐졌다. 넘실대는 보리 이삭 위로 나비가 날아드는 그 광경에 그는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숨이 멈출 듯한 감동에 그 날짜(1977년 6월 10일)까지 기억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충격적이기까지 했어요. 비문명의 과거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에서 끓어올랐고요. 아마 핏줄을 타고 조상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애절한 서정을 보리밭에서 보았나 봐요. 일순 6.25 전쟁 때 피난 가서 만난 보리밭이 떠올랐고요.” 이튿날부터 보리밭을 누비고 다녔다. 그제야 빛에 따라 백록으로도, 연둣빛으로도 빛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튼실한 이삭들이 찬란한 왕자의 자태 같다면 거두지 못한 썩은 이삭들은 폼페이의 폐허처럼 보였다. 줄기가 꺾여 땅에 묻힌 보리들이 다시 파랗게 싹을 틔우는 것에선 감동도 맛보았다. 그 모든 아름다움은 ‘한국적 서정’이라는 단어로 압축돼 그의 그림 속에 담겼다. 이 ‘한국적 서정’ 안에는 ‘그리움’ ‘한’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위) ‘망초꽃이 있는 청맥’, 순지 5배접, 암채, 100×220cm, 1995보리밭 그림으로 그는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과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의 보리밭 그림은 3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한 화폭에 1천 5백 개 이상의 이삭을 그리고, 그 이삭 하나에 30개 정도의 보리알을 그리니, 4만 5천 개나 되는 보리알을 그려 넣는 셈이다. 물감을 두껍게 발라 실제로 편평한 화면에서 볼록하게 나오게 한 뒤 낱낱의 알갱이마다 명암을 주는 작업까지 더한다. 보리 이삭 사이로 뻗은 보리 수염은 보리알의 3배가량인 15만 개의 선을 그어야 완성된다. 이렇듯 고된 노작 勞作이다 보니 1백 호짜리 작품을 그리는 데 6개월에서 2~3년까지 걸린다. 5년 가까이 그린 작품도 있다. “이숙자 선생의 보리에서는 땀 냄새가 난다”던 어느 기자의 말은 여러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그는 “어서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돼야 보리 수염을 또 그릴 수 있을 텐데” 하는 기쁨 속에서 그 시간들을 보냈다.
1980년대 중반 이제 그만 보리밭을 떠나려는 갈등이 일 때 ‘소’를 만났고, 보리밭으로 들어온 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그려온 누드를 보리밭에 접목해 ‘보리밭의 이브’를 탄생시켰다. “옛 속담에 ‘비단 속곳 입고 보리밭 매러 간다’ ‘보리밭 머리만 지키면 일 년 농사가 거뜬하다’라는 게 있어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봄이 되면 보리밭에 숨어서 로맨스를 즐겼어요. 보리밭의 또 다른 서정이죠.” 보리밭이 이브를 품어주는 듯도 하고, 이브가 보리밭을 어미처럼 품어주는 듯도 한 ‘보리밭의 이브’ 연작에서 나는 ‘모성’과 ‘생명’을 읽는다. 석채(원석을 분쇄해 정제한 물감으로 그리는 기법)로 그려 더 눈부시고 싱싱한 모성.
요즘 그의 보리밭 그림에는 하늘도, 땅도, 가녀린 들풀도 등장한다. 보리알과 보리 이삭, 수염의 디테일에 천착하던 예전 그림과는 좀 다르다. 땅과 줄기의 관계, 하늘과 보리밭의 관계, 보리밭과 가녀린 들꽃의 관계가 그림 안에서 보인다. 세상 만물의 관계가 보인다. 간절한 마음, 따스한 마음, 애처로운 마음으로 존재를, 세상을 바라보게 된 큰 어른의 눈이다. “그림 그리며 인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만으로 전투하듯이 그림 그리며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마음의 좌절이나 갈등이란 없을 것 같아.” 그의 이 말에서 나는 생생한 청춘을 보았다. 칠순을 바라보는 큰 작가, 그는 어디로 더 흘러가고 싶은 것일까. 5월, 그의 그림 속 푸른 보리밭에 바람이 흐르고 물기가 돈다. 그 속에서 뉘 걸어오시는 것 같다. 님이런가.
이숙자 님께 1930년대식 디자인을 창조한 워터맨 ‘찰스톤 흑색 골드 트림’을 선물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