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고 술빵처럼 부풀어버린 몸매,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남편의 낙오자 같은 뒷모습, 아이가 낮잠 든 동안 거실을 서성대는 아내의 하루. 그렇게 자잘한 일상의 것들이 사실은 여자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음을 우린 늘 적당히 지치고 나이 든 후에야 깨닫는다.
‘여자 엄미금’도 그러했다. 살뜰한 남자 만나 그림 그리는 꿈을 잠시 접은 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끔은 부부싸움으로 기운도 빼며 ‘집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는 사이 ‘아이와 남편의 인생 폭이 넓어지는 동안 내 인생은 좁혀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남편은 안방을 작업실로 내주며 ‘박완서 선생도 식구들 밥 냄새에만 묻혀 살다 마흔 살에 등단했다. 늦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그려보라’ 했다. 아침마다 남편과 아이를 일상의 전장으로 내보내고 나면 그는 아무런 요구도, 책임감도, 산만함도 없이 ‘안방 작업실’에서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자기 안으로 잠겨 들어갈 시간을 가지게 된 그는 ‘다시 그릴 수 있게’ 됐다. 처음엔 유화를 그리다, 유화에 깊은 맛을 넣고 싶어 민화를 배웠다. 그룹전에 낸 작은 민화 작품을 재독 교포가 보고 함부르크에서 전시를 열 수 있게 주선했다. 그 후로 눈에 띄는 전시를 여럿 치르면서 민화 작가로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민화를 현대 회화와 접목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 엄미금으로 살고 있다.
2월호 표지 작품 ‘살아가는 이유’는 여자 엄미금과 작가 엄미금의 인생을 그대로 닮은 그림이다. 색동의 책갑(책을 넣어둘 수 있게 책 크기에 맞춰 만든 상자로, 민화의 책거리 그림에 많이 등장한다)이 켜켜이 쌓인 것처럼 아롱다롱한 일상을 한 켜 한 켜 쌓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 짐이기도 하지만 덤이기도 한 여자의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이렇게 고운 색동의 인생이 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 ‘집사람’으로만 오래 살다 늦깎이 작가로 성장 가도에 있는 작가 엄미금이 그린 책거리 그림엔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다.
1 ‘봄-새벽에 일어나면 아침에 할 일을 생각하고’, 72×72cm, 장지에 분채・석채
2 ‘어린 왕자’, 22×22cm, 캔버스에 채색
3 ‘살아가는 이유’, 60×68cm, 장지에 분채・석채읽는 재미가 있는 인생과 그림그의 책거리 그림 ‘살아가는 이유’는 시점이 무시되어 있고 사물도 자유분방하게 배치돼 있다. “전통 민화의 책거리 그림이 그래요. 시점도, 대상의 배치도 자유분방해요. 그러면서도 조화가 있어요. 놀라운 건 서양의 입체파 그림과 조형 원리가 비슷하다는 거예요. 이집트 벽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은 얼굴은 옆을, 상체는 앞을, 하체와 발은 옆을 향하잖아요. 이런 걸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전통 책거리 그림도 정면성의 법칙을 따른 그림이 아닐까 싶어요. 위에서 본 책, 옆에서 본 책, 정면에서 본 책의 모습이 한 화면에 담겨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민화라는 게 얼마나 글로벌한 그림인지요.” 그는 민화의 전 지구적인 의미를 설파하는데, 나는 자꾸 인생과 빗대려고만 한다. 민화는 위에서, 옆에서, 정면에서 뜯어봐야 제맛을 아는 인생 같다고 자꾸 생각한다.
작가 엄미금 씨는 전통 민화에 실험과 상상을 더해 읽는 맛이 나는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한동안은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민화 그리기에 몰두했다.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화조도 안에서 어린 왕자가 뛰논다. 어린 왕자는 도원에서 피리도 불고, 여우를 베고 낮잠도 자고, 화투 그림 안에 들어가 기타도 친다. “동화적 환상이라기보다는 모순투성이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가슴 한구석에 묻은 꿈을 담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어수룩하게 구성하고 색채도 순박하게 넣었고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 되길 바라면서.” 서양의 철학적 우화가 동양의 민화 작가에 의해 꿈이라는 새 옷을 입었다.
그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민화는 보통 순지(100% 닥으로 만든 한지로, 뒷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얇다)나 장지(아주 두꺼운 한지)에 분채나 석채 같은 자연 물감으로 그리는데, 그는 캔버스에도 그리고 유화 물감으로 두껍게 그리기도 한다. 한지에 분채로 그린 책거리 그림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앙큼하게 올라가 있는 상상을 덧입힌다.“민화를 ‘본뜨기 그림’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일부분만 보는 거예요. 같은 화조도라도 그려진 시대와 작가의 철학이 제각각 담기지 않을 수 없어요. 눈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여 본뜨기 했나 싶은 그림에도 그린 이의 생각, 살아온 인생의 빛깔이 제각기 담겨 있으니 귀한 그림이죠. 나는 나만의 상상을 더하는 것이고요.”
다 듣고 나니 정말로 민화는 아롱다롱 쌓아가는 그림이란 걸, 인생을 닮은 그림이라는 걸 알겠다. 그리고 산다는 건 별것 아니면서도 아주 특별한 기회임을, 별것 아닌 듯 보이면서도 아주 특별한 이 그림이 이야기해준다. 
화가 엄미금 씨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문화재 전공)을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논문 주제가 ‘조선 후기의 책거리도 연구’일 정도로 우리 민화의 맥을 탐구하면서도 실험을 보태는 데 힘쓰고 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개인전 <잃어버린 색채를 찾아서>를 시작으로 다섯 차례 개인전을 열고 그룹전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