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모자 보관 가방 위에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은 기생이 그려져 있다. 기생의 눈길에는 일몰처럼 고적한 기운이 가득하다. 앞으로 다가올 숨차고 애달픈 생애를 예감한 건가. 캔버스 역할을 하는 가방은 젯소(캔버스에 유화로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바탕칠 재료)를 칠했는데도 낡고 오래된 물건임이 여실하다. <행복> 10월호 표지 작품 ‘Alienation’이다. 김정운 씨가 뉴욕에서 활동할 때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모자 보관 가방과 그 위에 낯설게 그려진 기생의 모습. “기생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을 겁니다. 이 가방도 어느 날 낡아 버려진 물건입니다. 미국의 물건과 한국의 여성, 굳이 연결 고리를 찾자면 ‘소외’라는 말이 적당하겠네요.”
1904년에 하와이로 이민 간 가족을 서양 약장에 그리거나, ‘사진 신부’(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국 농부들은 한국의 처녀를 사진으로만 맞선 본 후 바로 결혼했다. 그런 신부를 ‘사진 신부’라 부른다)를 오래된 나무판에 그려 넣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멀리 떨어진 자’의 정서가 흐른다. 버려진 사물, 오래된 사물 위에 ‘소외’라는 의미를 그려 넣는 작가 김정운 씨. 비록 고향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떠나왔으나, 수고의 짐은 그대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의 작품에서 읽는다.
낡은 시간의 힘 “흰 캔버스는 내게 표정이 없어 보입니다. 작가의 의도만 담는 빈 그릇이죠. 대신 가방이나 상자, 소반 같은 오브제는 내게 그 자체가 표정이 있는 물건이죠. 누군가의 시간을 함께 살아냈고 버려진 그 물건들이 김정운이라는 작가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시간을 살게 된다는 것, 황홀한 일입니다. 그 표정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이 내가 말하려는 걸 제대로 보여주죠.” 산다는 게 별것 아니면서도 아주 특별한 기회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이 여행 가방들처럼 적당히 지치고 낡은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 낡은 시간이 갖는 힘.
그는 벼룩시장을 쫓아다니며 직접 물건을 찾고, 그걸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쓰다듬어보고 그 위에 손으로 시간의 흔적을 기록한다. 발견하기, 시간 찾기, 기억 찾기, 만지기.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오래된 사진이나 잡지 속 이미지를 손으로 세밀하게 옮겨 오브제와 결합시킨다. 변형하기, 그리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낡은 시간’이다. 오래되고 허물어진 모습인데도 마음이 찌푸려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처럼 극사실도 아니지만 우리의 옛 어른들을 보는 듯한 친숙함을 내 그림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나는 차가운 미술이 싫습니다. 내 그림 안에 붓 자국과 따뜻함이 담겨 있기를 늘 소망합니다.”
스토리텔러가 되다 사계절을 슬리퍼만 신고 다니는 가난한 청춘이면서도 그는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았다. 이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낼 수 있는 힘은 미술이 그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러시아로, 뉴욕으로 계속 길에서 길로 떠돌았으나, 예술이 삶에 섬광 같은 순간을 주리라 확신했다. 러시아에서는 가난한 작가들이 그려내는 사실적 풍경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물감이 금빛보다 더 빛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브루클린에서는 작업실을 함께 쓰던 70대의 조각가 아메리고를 통해 ‘그림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운 씨가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구해 오면 아메리고는 그 물건의 내력과 용도를 설명해줬고, 김정운 씨는 그 물건의 스토리에 새로운 스토리를 더하는 스토리텔러가 됐다.
50대를 바라보는 지금, 엥겔계수 따위에 무감할 것 같은 그 옆에는 입시미술학원을 살뜰히 운영하며 그의 예술을 돕는 아내, 예술가인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두 아이가 있다. 그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이제 그가 가진 소망이라면 천천히 가더라도 ‘깊은 곳’을 건드릴 줄 아는 작가가 되는 것. 항상 불평 많은 삶만 바라보다 그처럼 웃는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을 떠돌라, 여행 가방 당분간 그가 작업에서 사용하는 오브제는 여행 가방이 대다수를 차지할 것이란다. “이동과 보관을 반복하는 여행 가방은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은유합니다. 나의 예술혼(몸이 아닌)도 맘껏 세상을 떠돌며 맘껏 세상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세계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에 응답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김정운의 또 다른 이름, 여행 가방입니다.” 익살꾼의 얼굴과 세상 다 알아버린 듯한 얼굴을 모두 가진 작가 김정운 씨. 앞으로 그의 여행 가방 위에는 또 어떤 만화경 같은 세상이 그려질까. 이 남자의 말 없는 붓질을 헤집고 라디오는 덤덤히 가을 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형 예술가 김정운 씨는 1961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불혹의 나이에 러시아로 건너가 Academy of Art Saint Petersburg I.Repin에서 공부했고,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4년 동안 작업을 이어나갔다. 뉴욕과 한국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고, 올해 8월 갤러리 순수에서 6년 만의 개인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