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te’(2006) 시리즈와 함께 ‘진짜 문’ 앞에 선 화가 이도현 씨소녀가 낡은 벽에 분필로 네모를 그리자 지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영화 <판의 미로>), 토끼굴을 따라 들어가 당도한 이상한 나라에서는 너무 작아 들어갈 수 없는 40cm짜리 문이 열리며(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벽장 속을 더듬다 찾아낸 문을 스르륵 밀면 판타지 세계로 통한다(영화 <나니아 연대기>). 화가 이도현 씨는 이렇게 수수께끼같은 문 앞에 선 소녀다. 그가 그린 문은 늘 반쯤 열려 있고, 문 바깥에서 벌써 환상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다른 종의 꽃이 모인 하이브리드 식물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천상의 공간이, 먼 세계로 향하는 좁은 길이 빠꼼이 엿보인다.
문을 노크하게 만드는 것은 ‘꿈’이다. “세상에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꿈을 먹고 살지요. 꿈이 끝나면 생명도 끝나요. 꿈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도 만들어내지요.” 이도현 씨는 매일 밤 잠잘 때도 꿈을 꾼다. 꿈이 하도 극적이어서 그런지 불면증이 심해서 그는 하루에 겨우 두어 시간 눈을 붙인다.
“벽이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문이 공간을 구분해요.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경계가 나뉘지요. 빈 방의 문이 닫혔을 때 문득 느끼는 고립감을 상상해보세요.” 그는 오랫동안 문을 탐구해왔다. 어디를 가도 문이란 문은 다 카메라에 담아야 직성이 풀린다. 멋진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은 적도 많다. 그에게 특히 매력적인 문은 녹슨 낡은 철제 대문, 열면 삐걱 소리가 날 만큼 육중한 목재 대문이다. 이런 낡은 문에는 이야기가 서려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그려낸 문은 여느 가정집 문이나 대문처럼 평범하다. 단, 색상이 강렬한 원색이다. “제가 그린 문은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거든요. 그래서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을 그리되 비현실적으로 강렬한 색상을 칠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전시장을 찾은 아이들의 반응이다. 다섯 살쯤 된 아이가 그의 작품 앞에서 계속 발을 올렸다 내리더란다. “얘야, 그림에 흙 묻는다”며 아이를 재지하는 순간 그는 ‘아차’ 했다. 아이는 정말로 문 뒤에 뭔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는 상상의 힘을 잃은 ‘어른 피터팬’이 된 기분이었다.
9월호 표지 작품 ‘The Present’(2007) 역시 문의 모티프가 담긴 작품이다. 문을 여는 대신 상자의 모서리를 찢어내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지금 삶에 선물 상자 하나가 툭 던져졌어요.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지 행복할 것 같아요. 참지 못하고 한 귀퉁이를 뜯어보았더니, 그 속에 제가 꿈꾸는 이상향이 펼쳐집니다.” 빠른 음성으로 이렇게 쏟아내곤, 자신이 탈출을 강렬하게 꿈꾸고 있나 보다며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고 도피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영어로 ‘현재’가 곧 ‘선물’이잖아요. 제게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는 현재가 가장 중요해요. 다만 틈틈이 이상향을 그려보는 거죠.” 선물 상자 앞에 펼쳐진 알록달록한 길은 쇼의 시작을 예고하는 ‘레드 카펫’이자 두근거림을 배가하는 ‘마법의 양탄자’이다.
이제 쇼가 시작될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그대, 첫발을 내디디겠가? 잊고 있었던 <오즈의 마법사> 첫 시작을 불러내본다. 노랑 길에서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길을 도로시가 한 발 내딛지 않았다면?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속에 나를 던지기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색다른 시공에 놓인 저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일상에 파묻혀 나태하고 무뎌진 나를 상쾌하게 벗어버리려고요.”
(왼쪽) ‘The Secret’, 2006
(오른쪽) ‘The Box’(2007)
화가 이도현 씨는 영남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03년 김재선 갤러리 기획 초대전을 비롯, 다수의 그룹전을 개최했다. 2003년 올해의 청년작가상, 2008년 봉산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