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베어 물면 물이 뚝뚝 흐를 듯한 수밀도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떠 있다. 젖가슴처럼 부푼 수밀도 아래에는 치맛자락 같은 식탁보, 여인의 다리 같은 테이블 다리가 그려져 있다. 도원 桃園의 농밀한 향기가 풍겨 나올 듯한 작품 ‘수밀도’다. 농익은 여인의 육신 같은 이 그림. 그런데 그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매끈하고, 사진이라고 하기엔 너무 회화적이어서 그림인지 사진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묘한 작품.
그는 이 작품을 위해 테이블과 식탁보 표면에 석고 붕대, 젯소・젤미디움(흰색의 커버력이 뛰어난 물질로 안료나 재료를 붙이는 고착제)을 발라 하얗게 만든다. 이 표면 위에 테이블과 식탁보가 원래 지녔던 색감, 질감, 명암을 물감으로 칠하고(조각을 그림으로), 그림자까지 계산해 그려 넣어 인위적으로 입체감을 만든다. 그런 다음 그림자가 완전히 없어지게 조명을 설치하고 사진을 찍는다(이 행위만 놓고 보면 사진 작품이다). 그러고 나면 3차원 물건들이 2차원 평면으로 납작해진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눈썰미 없는 사람들은 알아볼 수도 없는, 조각도 회화도 사진도 아닌 작품이 된다. ‘C-print’라는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사진’방식을 최종으로 택한 작품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린다.
“잘 그린 그림을 ‘사진 같다’고 하고, 멋진 사진을 ‘그림 같다’고 하잖아요.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을 만들어낸다면 ‘절대미’에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2005년 이후 그의 ‘그림처럼 만든 설치 조각을 사진으로 옮기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가 이 묘한 작품들을 만들며 바란 건 무언가? 그건 핀볼 게임인지도 모른다. 한 게임을 이기면 다른 게임을 치러야 하는. 조각, 회화, 사진 중 어느 것도 포기하기 힘든 욕망 때문에 치러야 하는 게임. 하지만 게임을 통해 그는 예술이 꾀하는 궁극, ‘절대미’의 한 자락을 찾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왼쪽) 유현미 씨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후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까지 뉴욕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10여 차례의 개인전, 6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포비아> 등 6회의 전시를 기획했다. 모란미술상을 수상했고 저서로 <아트맵>(청어람미디어)이 있다. ‘신발 공작소’, 2009
1 ‘두 개의 문, Two doors’, C-print, 2007
2 '듣기, Listening’, C-print, 2008
3 ‘돌구름, Stone cloud’, C-print, 2007환영과 환상의 세상 수밀도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붕 떠 있는 ‘수밀도’처럼, 여성의 토르소를 상징하는 살색 의자와 남성의 푸른 귀가 함께하는 ‘듣기’처럼 그의 작품 속에서는 현실의 사물이지만 환영으로 보이는, 그래서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장면이 출몰한다. 그 그림 앞에서 에드워드 호퍼가 떠올랐는데, 자분자분한 설명이 뒤를 잇는다. “호퍼의 그림에는 한 화면에 밤과 낮이 함께 존재하거나 그림자 길이가 비현실적으로 긴 것처럼 그가 의도적으로 만든 비현실적 풍경이 보이죠. 저는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 호퍼가 영향 받은 베르메르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있어요. 시공을 초월해 절대미를 추구한 전통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지요.” 판타지 소설보다 다큐멘터리,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 통계 서적을 좋아한다는, 이 사색적인 예술가.
상상의 문 그의 작품에는 감상자의 상상력도 비상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 보색의 문이 그려진‘두 개의 문’을 보면 문 뒤에 두 개의 다른 인생이 자리할 것을 상상하게 되고, 돌덩어리들이 공중에 떠 있는 ‘돌구름’앞에선 무중력 세상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 이 모든 것은 방 안, 계단 앞, 아치형 기둥 뒤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이뤄진다. “한 발은 현실에 붙이고, 한 발은 환상의 세계로 향할 때 그 상상이 더 초현실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래야 대중도 쉽게 알아듣고요.”
그는 꿈에서 자주 날아다닌다. 꿈속에서도 작업하느라 꿈과 현실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는 그는 꿈에서의 상황을 스토리로 옮기기도 한다. 짧은 시 같은 작가 노트가 있다는데 그걸 엿보고 싶어진다. 심미안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지도 않고, 명사형 대신 동사형으로 친절하게 답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서성거리는 그의 말 때문이다. 유현미 씨가 조각, 회화, 사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작품으로 세상에 말하려는 건 뭘까? 그와 대화한 세 시간만으로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의 그림, 아니 사진만 연신 들여다본다. 그는 지나치게 ‘섹슈얼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는데, 나는 자꾸 “누군가의 가슴에서 길게 뽑아 올린 수밀도의 연정들”이란 시구가 떠오른다. 이 계절, 남녘의 도원에선 삼복의 태양에 수밀도가 익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