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아온 ‘꽃 그림’과는 여러모로 낯선 작품이다. 줄기도, 잎도 없이 정면에서 바라본 꽃송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치 섬처럼. 그래서 화가 서정희 씨의 연작 ‘꽃은 피고…’는 꽃잎이 섬세하게 묘사되었음에도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슬프다거나 로맨틱하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표정도 읽히지 않는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은, 정련된 꽃을 그렸어요.” 이유가 있다. 서정희 씨는 꽃 자체를 그린다기보다는 ‘관계’를 말하기 위한 소재로써 꽃을 그렸다. 그는 세상이 크고 작은 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왔다. 가령 우리 몸은 하나의 기관이 다른 기관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도 인맥을 이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관계’란 곧 우주가 존재하는 비밀이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가 교차된 선, 서로 의지하며 기댄 나뭇가지, 뿌리처럼 뻗어간 잎맥 등을 소재로 작업해오다가 5년 전 꽃에 이르렀다.
“셀 수 없이 많은 요소가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룸을 말하고 싶었어요. 꽃잎이 많은 국화가 적격이었죠.” 국화로 시작해 모란으로 넘어왔다. <행복> 12월호 표지 작품이기도 한 모란은 촘촘한 수술이 매력적이고, 수술과 꽃잎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모란은 꽃잎이 얇고 봉오리가 크기 때문에 단 며칠 동안만 피었다가 곧 져버린다. 모란이 피고 질 때마다 온 우주가 몸을 흔들었을 것이다.
(왼쪽) 화가 서정희 씨는 1981년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를, 1986년 파리 국립미술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그로리치 화랑의 개인전을 비롯, 지금까지 10여 회 개인전을 열고 70여 회 단체전에 참여했다.‘꽃은 피고…’(2005)작품이 수채화처럼 투명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이유는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스무 장 정도 레이어를 겹쳐 찍어낸다.“판화는 말 그대로 판에 찍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판과 그림 모두를 만드느라 작업 시간이 무척 길지만, 비로소 작품 한 장이 찍혀 나왔을 때의 희열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판화 하면 값싸고 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는 ‘나눔’의 측면을 간과한 오해라고 말한다. “삶의 어느 한순간을, 찰나의 감동을 두루 나눌 수 있는 장르가 바로 판화예요.” 대학교 때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판화의 매력에 빠져서 파리로 날아가 판화를 전공했다.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동양화의 핵심인 선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간 탐스럽고 건강하게 만개한 꽃을 그려왔다. 이때가 꽃의 존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 “머지않아 바람에 지친 꽃, 늙어가는 꽃도 그릴 거예요. 시든 꽃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 중 일부니까요. 젊을 때는 내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했는데, 나이 들면서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게 되더군요. 꽃 역시 변해가는 모든 순간마다 존재 이유가 있음을 작품에 담아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