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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미학
땅속에 잠든 보석, ‘돌’이 지닌 가치와 매력을 최초로 인지한 것은 바로 인류다. 오직 인간만이 돌에서, 그것도 수억 년 동안 결정화結晶化한 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 아름다움은 가치와 권력 그리고 부의 상징이 되었다. 오는 6월 30일까지 DDP에서 열리는 전시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Cartier, Crystallization of Time)>.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를 정화하며 투명하게 순환하는 물질의 기원을 찾는 귀한 여정이다.

전시 내 챕터 2 전시 작품 네크리스. ©Cartier ©Victor Picon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이라는 언약의 축복을 선사한 다이아몬드는 최소 10억 년 전 지구의 깊은 속살에서 그 여정을 시작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심도의 환경 속에서 탄소가 고온과 고압이라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결정화된 존재인 것이다. 그마저도 화산 폭발이 일어나야 비로소 지표 가까이 올라갈 수 있기에 기약 없는 영겁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다이아몬드는 1300℃의 마그마를 견디며 모든 탄력을 다해 쏜살같이 튀어 오를 것이다. 하지만 지표로 올라온 뒤에도 바람과 비에 깎이고 부서지며 자갈과 함께 강이나 호숫가, 해안가로 흘러가 눈에 띄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인간의 선택을 받는 것은 이런 험난한 시련을 이겨낸 강인한 생존자다. 극도로 희박한 기적으로 태어나 억겁의 세월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견디며, 찬란히 빛날 날을 차곡차곡 준비해온 다이아몬드. 이토록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지구의 모든 색을 구현하는 유색 보석은 더욱 복잡한 운명을 타고났다. 성장 과정에서 어떤 미량의 원소가 들어가는가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이름과 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색의 부재로 평가되는 다이아몬드와 달리 유색 보석은 색의 존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자연이 창조한 이들의 스펙트럼은 팬톤 차트를 능가할 정도로 풍요롭다. 하지만 이러한 매력과 힘을 알아본 것은 오직 인간뿐이었다. 보석의 색은 미학적 아름다움을 넘어 문화적,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인간이 색에 부여한 다양한 의미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단단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던 시대일수록 인간의 간절함과 욕망은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늘 몸에 지닐 수 있는 보석으로 응집되었다. 지구의 시간이 결정화된 보석을 소유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고, 그 간절함을 초자연적 힘을 지닌 것으로 믿은 보석에 투영했다. 이를 신앙의 상징으로 세우고, 왕관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절대 권력의 표상으로 삼았다. 역사의 변곡점을 거치며 다양한 시공간 속 사건 사고를 통해 드러난 보석의 민낯은 거의 비슷했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더욱 찬란해졌을 뿐.


장인 정신과 고도의 기술로 제작해 신앙, 권력, 부의 상징이 된 보석. ⒸMAHENGE GEMS
우리는 반짝반짝 연마된 모습으로 보석을 마주하지만, 원래부터 원석 자체가 매혹적인 빛과 색채를 뽐낸 것은 아니다. 숙련된 장인의 섬세한 손길을 통해 비로소 신비롭고 귀한 보석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 몸의 절반 이상을 잃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아름다움’을 획득해 훨씬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착용’이라는 원초적 욕망을 자극해 인간의 손끝과 창의로 ‘착용 가능한 예술품’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마침내 착용자의 스토리가 더해지면서 제 몫을 다한 보석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주인을 만나 또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간다. 단생종인 인간보다 길고도 긴 생명력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낙관주의는 결국 자연으로 향했다. 어쩌면 인간이 보석을 착용한다는 것은 지구의 시간이 만들어낸 가장 신비로운 창조물에 대한 믿음과 경의,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고 성찰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 윤성원은 주얼리 역사, 트렌드, 경매 투자, 디자인, 마케팅 등 모든 분야를 다루는 주얼리 스페셜리스트이자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 교수다. 저서로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세계를 움직인 돌> <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나만의 주얼리 쇼핑법> <잇 주얼리>가 있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2019년 도쿄 국립신미술관(Tokyo National Art Center)에서 선보인 이후 5년 만에 서울에서 두 번째로 개최하는 전시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이번 전시에서는 까르띠에 컬렉션으로 일컫는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 및 평소 공개하지 않은 개인 소장자들의 현대 작품을 포함한 3백여 점을 한데 모아 까르띠에 스타일의 강력한 문화와 창조적 가치를 보여준다.

전시는 관람객에게 개념적 시간을 다시금 일깨우며 시작된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어둡고 긴 공간 끝에서 3.5m 길이의 시침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시계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데,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장면을 목도하며 관람객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되짚는 동시에 만물의 미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열두 개의 기둥에서 빛이 쏟아지는, 지름 14.5m의 원형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동굴의 천장 틈새로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천국의 빛을 연상케 하는 연출. 그 조명 아래엔 까르띠에의 아름다운 탁상시계가 배치되어 있다. ‘시간의 공간’이라 이름 붙인 이곳은 전시의 프롤로그이자 이번 전시의 핵심인 시간을 표현한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내 챕터 3 전경. ©Yuji Ono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내 트레저 피스 파트. ©Cartier ©Victor Picon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내 챕터 2 전시 작품. (오른쪽) 플래크 드 쿠(초커), 까르띠에 파리, 1903, 까르띠에 소장품. (왼쪽) 브레이슬릿, 까르띠에, 2014, 까르띠에 소장품. ©Cartier ©Victor Picon
돌과 나무, 시간을 아로새기다
이번 전시는 시간을 축으로 하여 ‘소재의 변신과 색채’ ‘형태와 디자인’ ‘범세계적인 호기심’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구성된다. 전시 디자인은 아티스트 스기모토 히로시와 건축가 사카키다 토모유키가 설립한 건축 회사 신소재연구소(New Material Laboratory Lab)에서 맡았다. 나무, 돌, 섬유 등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자연 그대로의 소재와 까르띠에의 창의적 작품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전시 디자인은 마치 하나의 공예 작품처럼 깊고 고요한 울림을 주기 충분했다.

첫 번째 챕터의 주제는 ‘소재의 변신과 색채’. 플래티넘을 활용하는 기법, 규화목 같은 독특한 소재, 다양한 보석을 이용한 대담한 색채 조합(블루 사파이어와 그린 에메랄드, 또는 형형색색의 뚜띠 프루티)까지, 참신하고 창의적 디자인을 향한 까르띠에의 혁신에 초점을 맞춘 섹션으로 이곳에 놓인 작품들은 공예 기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공간을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장치로 쓴 건 한국의 전통 소재인 ‘라羅’로, 천장에서부터 길게 매달아 마치 고귀한 존재를 가리는 캐노피처럼 연출했다. 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는 삼나무로 만든 쇼케이스가 가지런히 배치돼 관람객은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노피 안에서 마치 어둠 속에서 떠오른 듯한 진귀한 보석을 더욱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

석재가 켜켜이 쌓여 압도적 풍경을 자아내는 두 번째 챕터 ‘형태와 디자인’에서는 순수한 선과 형태의 창조적 본질을 찾아 떠나는 까르띠에의 여정이 펼쳐진다. 자연 세계에서 드러나는 선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에센셜 라인Essential Lines’과 ‘스피어Spheres’, 주얼리의 구조적 요소에 주목해 주얼리가 어떻게 그 자체로 건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뉴 아키텍처New Architectures’, 움직임이 착시를 통해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어떻게 작품에 표현되는지를 알아보는 ‘옵틱스Optics’ ‘혼돈 속의 조화(Harmony in Chaos)’ 등 주얼리 세계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영역에서 메종이 어떤 방법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지 살필 수 있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내 프롤로그 파트. ©Cartier ©Victor Picon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내 팬더 브레이슬릿. ©Cartier ©Victor Picon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거대한 오벌 형태의 쇼케이스를 구현한 마지막 챕터에서는 까르띠에 디자인의 원동력인 ‘범세계적인 호기심’을 주제로 세계의 문화, 동식물에서 영감을 얻은 독보적 작품을 선보인다. 루이 까르띠에의 세상을 향한 끝없는 관심을 바탕으로 그의 아트 컬렉션과 메종의 디자이너로부터 영감을 받은 라이브러리에서 탄생한 호기심은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특징이 되었다. 까르띠에는 이러한 호기심을 발판으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독특하고 혁신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1백77년 동안의 까르띠에의 기록을 살펴보면 셀 수 없이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들의 건축·신화·패턴과 색상은 까르띠에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 밖에도 1914년 시계 패턴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까르띠에의 대표 모티프로 자리 잡은 ‘팬더panthère’를 비롯해 한국에서 영향을 받은 특별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의 관전 포인트는 각 챕터 마지막 파트의 쇼케이스로, 한국과 일본의 고미술품이 까르띠에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다. 고미술품은 스기모토 히로시가 이번 전시를 위해 그의 개인 소장품과 한국 고미술품 컬렉터의 컬렉션 중에서 특별히 엄선한 것. 오래도록 이어져온 한국과 일본의 독창적 미학을 품은 작품과 유럽 문화에 뿌리를 둔 까르띠에의 섬세한 작품이 함께 자리하며 공명하는 것을 발견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편 전시장 입구에는 1백년이 넘는 세월을 품은 시계를 시간이 역행하도록 재구성한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이 맞이하는데, 이번 전시 테마를 완벽히 보여주는 설치작으로 꼽힌다. 장구한 시간을 거쳐 탄생한 보석과 경이로운 자연, 세계 각국의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장인의 독보적 공예 기술로 결합한 결정체. 까르띠에 주얼리를 통해 아름다움의 이면에 깃든 시간과 순환의 가치를 경험하길 기대해본다.


<전시 정보>
기간 5월 1일(수) ~ 6월 30일(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트홀 1, 컨퍼런스홀
주최 서울디자인재단, 중앙일보 협조 중앙화동재단 부설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우쓰노미야시/오야석재, 유진 스튜디오
특별 협력 까르띠에 전시 디자인 신소재연구소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공식 웹사이트

구성 이주현 | 자료 제공 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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