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 정영선.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뒷마당인 종친부마당의 정원을 직접 조성했다. ‘인왕제색도’의 풍광을 담아 인왕산을 향해 시야를 열고 관목류를 전통 느낌으로 연출했다.
정영선(조경설계 서안 대표) 한국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1호 국토 개발 기술사.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1호 대학원생으로 졸업 후에는 청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서양 조경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1987년 조경설계 서안을 창립하고 공공과 민간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한국의 경관을 만들어왔고, 작년에는 조경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했다. satla.co.kr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김선우 시인의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의 시구처럼 식물이 자라는 모습은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끝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자연은 이제 도시 곳곳에도 깊숙이 뿌리내려 날씨 좋은 날이면 한강공원이나 여의도공원을 산책하고, 볕이 뜨거운 날에는 가로수가 만든 그늘 아래로 피하며 우리는 경관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렇게 일상의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조성되어 있지만, 사실 그 뒤에는 세심하게 길을 내고 식물의 자리를 고민하는 조경가가 있다.
정영선은 조경과 정원이라는 영역을 한국 땅에 심고 지금의 모습으로 일구어낸 한국 1세대 조경가다. 그는 1970년 국토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된 한국 조경사와 함께 성장하며 올림픽공원, 광화문광장 같은 국가 주도 프로젝트부터 기업의 건축물, 개인의 정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경 작업을 해왔다. 사람과 경관의 관계, 건축과 도시, 나아가 대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작업해왔으며, 옛 선조가 만든 경관과 우리 땅 이야기를 발굴해 지금에 맞는 풍경으로 환원하고, 고유 자생종을 지키고 알리는 행동가이기도 하다. 한국 조경의 역사는 곧 정영선이라는 인물의 연대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고, 여전히 이어지는 그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전시를 열었다. 60여 개 프로젝트, 기록 자료는 5백 점이 넘는다. 전시장 바닥과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언제나 한결같은 정성으로 땅에 길을 내고 식물을 쓸어 내려온 그의 흔적을 발견해볼 시간이다.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되짚어보며,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그간 펼쳐온 조경 활동을 총망라하는 자리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을 주제로 여는 첫 전시로, 건축의 주변 분야로 인식되던 조경을 도시와 자연, 건축을 연결하는 종합과학예술로 조망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전시 제목은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을 충실하게 담아내며 ‘조경’이라는 분야를 조망합니다. 미술관에서 조경을 주제로 전시한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인데, 어떤 계기로 전시를 하게 되었나요?
후학을 위해 길을 마련한다는 마음이 가장 컸어요. 조경이라는 분야가 처음 자리 잡을 때 경관을 만든다는 의미로 인식되다 보니 아직도 꽃이나 나무를 심는 장식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조경이라는 분야를 바로 알리고, 어떤 각오와 정신으로 일해왔는지 보여주려 했습니다.
전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나요?
한국은 국가가 나서서 조경이라는 분야를 도입하고 키웠어요. 국토를 개발하기 위한 여러 시도 중 하나였거든요. 그에 맞춰서 처음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을 했고, 시간이 흘러 호암미술관을 시작으로 기업이 연수원이나 휴양 시설, 병원 등의 조경을 의뢰하면서 민간 프로젝트로 한 차례 흐름이 바뀌었어요. 그다음에는 크고 작은 개인 정원을 하면서 또 한 차례 분야가 확장했고요. 이렇게 우리나라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등장한 후로 지나온 과정을 빈틈없이 보여주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있어요. 한국의 풍경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곳 미술관 마당만 봐도 그렇죠. 서울 한복판의 잔디밭에 올라섰는데 미술관이 있고, 그 너머에 경복궁, 또 그 너머로는 인왕산이 보여요. 이런 풍경이 또 어디 있겠어요. 옛것과 새것이 잘 융화된 지금 서울의 소중함을 알고,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면 합니다
원다르마센터 제공
원다르마센터 선仙을 실천하는 종교 시설로 명상과 수련을 위한 장소다. 미국 뉴욕주의 허드슨강 상류에 부지를 마련한 수련원을 위해 위로와 안식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경관을 설계했다. 광활한 땅의 흐름을 읽고 이곳의 식생을 연구해 수련원 자리와 자연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길의 형태를 구상했으며, 주민들과 함께 과수를 재배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선생님의 작업만으로 한국 조경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선유도공원을 설계할 때 “겸재 정선의 선유도는 못 구하고, 이 시대에 맞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했지요. 그때에 맞는 모습을 지킨 것처럼, 지금의 서울에 맞는 자연경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장소마다, 건축마다 다르니까 한 가지로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다만 주변의 산이나 숲마다 누가 여기에 시를 썼고 정자를 지었고… 그런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무수히 남아 있는데, 흔적을 살리기보다 새로 건물을 세울 계획만 하니 아쉬워요. 한강은 강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를 심는데 그것도 속상하고요. 어떤 시장은 이 나무를 좋아해서, 또 어떤 시장은 저 나무를 좋아해서, 그렇게 자꾸 바뀌다 보니 가로수 한 그루도 지속하기가 어려워요. 옛날이었으면 시도 써서 읊고, 찾아가기도 하면서 설득했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서안 제공
디자인스튜디오 loci 제공
남해 사우스케이프 남해를 조망하는 언덕에 지은 골프장. 클럽하우스와 호텔 주변 경관을 설계, 시공했다. 거대한 자연경관의 차경借景, 그리고 그 장소에 남겨져 있던 큰 암반과 암석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이어가며 독특한 경관과 정원을 빚어낸 작품이다.
한국적 경관과 조경은 선생님이 평생 작업해온 언어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발견한 우리의 조경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가까운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하고도 양식이 전혀 달라요. 중국은 옛 시나 그림에 등장하는 이상적 세계의 경치를 압축해서 보여줘요. 이걸 축경식이라 해요. 일본은 내전이 많았기에 정원도 정원이지만 담을 아주 높게 둘러 세워 보이지 않게 한 게 특징이고요. 우리나라는 배산임수라 하죠. 뒤에는 산이 서 있고, 앞에는 논과 들판·과수원·마을이 내려다보여요. 야트막한 울타리는 형식적으로 존재하고요. 이 배산임수 때문에 전 세계에 유례없는 화계정원이 탄생했어요. 뒤뜰에 계단식으로 화단을 짓는 거예요. 앞에는 좋은 경관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으니 정원을 앞뒤의 경관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삼은 거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조성한 계단식 정원이 있지만 그들은 앞에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제가 만든 호암미술관도 뒤뜰이 예뻐요. 연못도 달라요. 우리는 직선과 곡선이 잘 융합되고 선도 얌전해요. 이런 모습에서 정원부터 건축까지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한국 미의 근본이 드러나는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정원을 만드는 태도이자 한국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인 거죠. 그런 모습이 제 정원에 모두 녹아들어 있어요.
ⓒ양해남
희원 호암미술관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조성한 정원. 담 안팎의 조망을 잇는 전통 정원 조형미의 근원인 차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하고, 전통 정원의 경치를 재현했다. 석단, 정자, 연못, 담장 등 정원과 건축 요소가 서로 숨겨주고 드러내는 유연함이 멋스럽게 어우러져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간이 탄생했다.
조경은 땅과 건축물, 자연까지 실로 다양한 요소를 고민하고 조율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다 중요하지요. 가능하면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면서 시민이 잘 이용할 수 있게 하고, 건축물이나 공간이 제 기능을 잘하면서 돋보이도록 해야 해요.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아무리 도시 한복판이라도 바라볼 만한 것이 뭔지, 주위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장소를 보며 그 땅과 가장 잘 맞는 풍경을 찾아야 해요.
조경은 시간, 계절,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이 건축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설계할 때는 이런 부분을 어떻게 고려하나요?
조경은 시간의 개념이 담긴 예술이에요. 설계할 때, 5년 후, 10년 후, 20년 후는 어떨지 직원에게 그려보라고 해요. 그렇게 자랐을 때 건물이 지나치게 어두워지지는 않는지, 식물의 높이는 서로 비슷한지 살피죠. 꽃과 나무를 심을 때도 잎이 떨어지거나 눈이 오면 어떨지, 꽃이 피었을 때 색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공부합니다.
ⓒ이동협
선유도공원 기존 선유정수장을 철거하는 공원화 사업의 현상 공모 당선 프로젝트. 정수장이 만들어낸 공간과 땅 모양을 이해하고, 환경과 교육 공간으로 전환했다. 설계의 핵심은 시간이 지나며 철근콘크리트의 잔재가 녹음으로 뒤덮일 앞으로의 공간을 예측하고 그에 맞추어 설계하는 것이었다. 도시 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동시대 도시환경 계획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 작업이다.
서울시 푸른도시여가국 제공
경춘선 숲길 1939년 개통한 이래 서울과 춘천을 잇던 철도인 경춘선 일부 구간을 공원화하는 프로젝트. 대부분의 철도가 일본 주도 사업이었던 데 반해, 경춘선은 춘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적으로 건설한 근대 문화유산이다. 그 의미를 바탕으로 철길, 철교 등 남겨진 근대산업 시설과 녹지까지 보존하고, 공원은 지역 주민의 공간으로 환원했다. 산업 시설을 공원화한 대표 프로젝트이자 조경 설계가 주도해 도시 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촉진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여전히 조경을 공부하시나요?
그야 당연하지요. 요즘에는 기억력이 자꾸 쇠퇴해서 꽃이나 나무 이름을 자주 잊어버려요. 그래서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어요. 다시 공부하게 되는 것. 그게 뭐더라 하면서 책을 보고, 그러다 또 다른 생각이 들어 한참을 더 펼쳐봐요. 이래서 죽는 날까지 공부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평생 정원 일을 해왔음에도 또 새로운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자식처럼 살갑고 사랑스럽고 귀여워요. 나날이 변하는 것도 좋고요. 그래서 계속 쓰다듬게 돼요. 그렇게 좋아서 아침이고 밤이고 쓰다듬는 게 정원 일입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땅의 시인 조경가 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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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생동하는 5월, 조경가 정영선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로 찾아왔다. 그가 땅에서부터 시작하고 땅 위에 일구어온 일생이 올해 봄의 시간을 오롯하게 은은히 물들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