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은 <뉴스데스크> <출발 비디오 여행> 등을 진행한 아나운서이자 현대미술 안내서 <서늘한 미인>(2004)과 <예술가의 방>(2008)을 썼고, <나를 더 사랑하는 법>(2009)을 번역한 작가다.
예술이라 일컫는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데, 그가 이미지 세계에 몸을 은신하고 빠져들게 된 것은 다섯 살 때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투시력(Clairvoyance)’이라는 작품을 만나고 나서다. “새알을 보고 화가는 날개를 쭉 뻗은 새를 그리고 있는 장면. 예술가는 남이 미처 보지 못한 미래성까지 볼 수 있는 존재다”라고 말하는 그와 함께 현대적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사람의 몫이며, 누구나 컬렉터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컬렉터 린다 로젠의 거실. 흰 벽과 무채색 가구로 이루어진 이 공간에 조지 콘도와 니콜라스 파티의 초상화를 걸었다.
4년이나 걸려 빛을 본 <디어 컬렉터>가 출간 한 달 만에 중쇄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컬렉터 스물한 명을 인터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팬데믹 시대를 맞으며 안으로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 정리, 밖으로는 시절 인연 정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나에게 꼭 필요한 ‘관계’에 집중하게 됐다. 사회적 격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운 친구들에게 안부 메일을 쓰며 우리가 남겨둔 ‘아름다움’을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전 세계 스물한 명의 친구가 호응했고, 가이드라인을 준 것도 아닌데 집집마다 걸려 있는 작품 사진이 도착했다. 30년 지기에서 7년 지기까지 우정의 비결은 ‘공통의 취향’이었다. 현대미술이 던지는 낯선 질문을 사랑하는 친구들의 컬렉션이다 보니 다소 생경한 작품도 많다. 이들이 어떻게 팬데믹을 통과해 자신과 집을 아름답게 가꾸었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 컬렉터의 거실에는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자개장과 전광영 작가의 초기작에 속하는 평면 회화 작품을 나란히 배치했다.
한때 미술 투자에 쏠리던 관심이 소유와 관심, 향유로 전환되며 컬렉팅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작품을 컬렉팅하는 것이 금전적 가치를 넘어 왜 경험의 확장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작가 위주로 작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는데, 친구들은 자신이 어떻게 작품을 해석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석의 변화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더라.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컬렉터라는 명확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컬렉터는 작품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굴해내는 현대적 고고학자이며, 안목으로 작품을 배치해 새로운 집을 짓는 건축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아트 디렉터가 직업인 컬렉터의 집으로, 마리메꼬 의자와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작품을 화분 사이에 두어 휴양지 같은 분위기가 난다.
책을 읽으니 예술은 미적 즐거움을 자극하는 도구이자 목적 자체가 되는 게 명확히 보인다. 이들의 삶에 예술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대를 이어 컬렉터가 된 가족 이야기가 첫 챕터에 나온다. 액자집 딸로, 뉴욕 톱 컬렉터가 된 린다 로젠이다. 작가들이 액자 작업을 맡기고 돈이 없어 작품을 대신 두고 갔는데, 세상에! 무명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이었다. 아버지는 작가들과 나눈 사적 대화, 고객의 취향을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전해줬고, 이 이야기는 최고의 컬렉팅 팁이 되었다. 그 어떤 예술에서도 배울 수 없는 안목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예컨대 초상은 인물의 생김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내면까지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터득한 린다는 조지 콘도George Condo와 니콜라스 파티Nicholas Party의 과감하고 다소 기괴해 보이는 초상화를 누구보다 먼저 컬렉팅했다. 현대미술은 시각의 즐거움을 뛰어넘는 지각知覺의 즐거움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린다의 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배우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깨달으면서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확장되는 경험을 집에서 하는 것이다.
13평 한옥에 고려 철탑과 알레산드로 멘디니 침대, 프랭크 게리의 위글 의자가 조화를 이룬다.
누군가에게 예술은 여전히 낯선 세계다. 좋고 싫음의 기준도 어렵다. 내 수입 안의 범위, 내가 머무는 혹은 사는 곳에 맞는 선택, 컬렉션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컬렉터의 자세도 중요해 보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컬렉터 이그나시오 리프란디의 말을 빌리자면 ‘열정(enthusiasm)’이 필요하다. 열정은 습관에서 생긴다. 요즘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물론이고 서울에 진출한 페이스갤러리, 타테우스 로팍 등 세계적 갤러리도 좋은 전시를 참 많이 연다. 그런 곳에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생활의 일부, 습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약속이 취소되면 무조건 근처 갤러리를 가본다. 그러다 우연히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의 환희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큐레이터에게 묻거나 집에서 찾아보고, 그다음에는 그 작가의 전시회 일정도 찾아보길 권한다. 또 하나 방법은 포스터나 엽서 서너 점을 집에 배치해보는 것이다. 위치를 달리해서 걸어보고 마음에 들면 작가의 드로잉, 판화, 유화, 설치 등 내 수입에 맞는 작품부터 구입한다. 현대미술 서적 한 권을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읽어본다면 더할 나위 없다.
김지은 작가는 어떠한 기준으로 작품을 큐레이션해서 삶을 채우는가?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보여주는 작품을 애호한다. 시간의 새로운 개념을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 쌀, 찢어진 사진 조각, 페트병, 실’을 연결해 보여주는 세라 제Sarah Sze, 집의 내부를 거꾸로 뒤집어 외부로 드러낸 ‘집(House)’ 시리즈로 유명한 레이철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도 20년째 따라다니고 있다. 10년쯤 뒤에는 작은 작품을 꼭 소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 기대의 시간을 즐긴다. 평소 전시회 가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 반한 작가가 생기면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한다. 전시 공간에 개별 작품이 어떻게 설치되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 큐레이션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갑이 안목을 쫓아오지 못해 툴툴거리며 계획을 세운다. 10년 만에 소장하게 된 작품도 있다. 스스로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우리는 왜 삶을 살아가는, 나를 대변하는 컬렉터가 되어야 하는가?
물건이 가득한 집이 아니라 행복이 가득한 집을 위해서다. 집 안 구석구석 쌓아둔 물건은 많은데 공허하다면 나와 관계를 맺지 못한 사물들 때문이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샀는데, 막상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거나 처음 살 때의 마음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의 취향’을 발견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게 부족한 무엇일 수 있다. 그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컬렉팅이다.
김지은 작가가 추천하는 컬렉터
회화 작업을 도예에 접목하는 제니 샐러먼은 예술로 집을 완성해가는 컬렉터이며, 자신의 집에서 전시를 두 번이나 기획한 적이 있다. 그 옆은 하루 종일 늘어지게 자는 게 낙인 검은 고양이 쿠키.
<뉴욕타임스>가 사랑한 집, 제니 샐러먼Jenny Salomon
“1백 년 넘은 브라운 스톤을 혼자 힘으로 고친 제니 샐러먼은 조부모님이 물려주신 작품들을 우선 배치했고, 이브 생로랑과 할아버지의 남다른 우정 등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스토리’를 모으는 컬렉터라 스스로를 생각한다. 랑방 찰스 오브 더 리츠 회장이던 리처드 샐러먼의 손녀로서 무엇이든 살 수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지지한다. 자신의 집을 전시 장소로 내주기도 하면서."
시장 논리, 타인의 평가에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이 끌리는 작품을 컬렉팅하고 과감하게 설치하기를 즐기는 이그나시오 리프란디.
컬렉션의 메시, 이그나시오 리프란디Ignacio Liprandi
“지금까지 연락하면서 이그나시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전화를 받은 것은 2022년 아르헨티나와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경기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네팔, 파리, 페루, 말리, 아마존 등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여행자인 이그나시오는 ‘첫눈에 반함’이라는 컬렉팅 원칙을 평생 지켜왔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뿌리인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주변의 초보 컬렉터들과 교류함으로써 그들을 알리는 데 열정적이다.
이그나시오는 난해한 니콜라스 로비오Nicola´s Robbio의 사다리와 버킷 설치 작품을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두고, 완전히 이질적인 세르히요 아베요Sergio Avello의 LED 작품 ‘초록 심장’을 바로 옆에 배치했다. 낯선 조합이 촉발한 어떤 불편·긴장·난해함 등 색다른 정서를 즐기고, 위치에 따라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달라지는 것을 현대성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란다. 정답은 없고 나만의 답이 있을 뿐이라며, 언제나 생각의 틀을 깨버리는 과감성이 컬렉터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조언한다. 그를 통해 내가 사는 집에도 언젠가는 설치 작품을 들여올 수 있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사진 제공 아트북스
- 작가, 아나운서 김지은 누구나 컬렉터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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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취향과 철학으로 일군 컬렉터의 집은 어떠한 모습일까? 컬렉터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시대를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공유하며 자신만의 미의 요새를 구축하는 일과도 같다. 아나운서이자 20년간 작품을 수집해온 컬렉터이며, 작가로 활동하는 김지은이 최근 현대미술 교양서 <디어 컬렉터>를 발간했다. 전 세계 곳곳에 예술로 연결된 스물한 명의 컬렉터와 일상의 작은 미술관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집을 소개하며, 컬렉팅은 금전적 가치가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경험의 확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