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로가 내다보이는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만난 임태희 대표. 4년여 전 이곳에 이사온 후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을 보며 그는 작업의 많은 영감을 얻는다.
디자이너 임태희는 교토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2007년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를 개소했다. 그는 전통과 역사에서 발견한 미의식을 자신만의 언어로 치환하고, 다양한 이와 협업해 하나의 미감으로 수렴하는 공간을 완성한다.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상공간이나 F&B가 그의 전문 분야이지만, 완성된 공간은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전통과 공생하는 도시 교토에서 건축을 배운 경험,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부족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시선을 바탕으로 모두가 디자인적인 디자인에 열광할 때도 그는 ‘디자인 없는 디자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의 작품에서 ‘미감’만큼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이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본질에 충실한 공간의 이면에 숨은 수많은 디테일은 그만큼 많은 사람과의 협업으로 완성된다. 한복 장인에게 깨끼 바느질 마감을 의뢰하고, 대나무 공예 작가에게 창 가리개와 천장 구조물을 주문하는가 하면 금속공예가와 함께 티백을 걸어두는 고리를 디자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것까지 공을 들이지만, 각각의 결과물은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그렇게 그는 임태희만의 한국적 미감을 쌓아오고 있었다.
비움이라는 일본의 미학 속 깊은 곳에 내면으로 침잠하는 정신이 내재해 있듯, 임태희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공간의 기저에는 순수함과 인간미, 그리고 정성이 자리한다. 그가 작업한 공간이 한 점의 공예 작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는 정성”이라 말하며 작업에 임하는 자세가 장인의 그것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가구는 물론 문손잡이, 사이니지 등 공간의 작은 요소까지 세심하게 작업합니다. 마치 공예품을 만드는 것처럼요. 어떤 계기로 지금과 같이 작업하게 됐나요?
옛 조상들은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주어진 터와 자연환경에 맞추어 집을 지었어요. 오늘날의 건축에서는 사라져버린 고유함이 있었죠. 지금은 산업화한 방식으로 훨씬 합리적이고 똑똑하게 건물을 짓지만, 저는 어쩐지 느리고 멍청해 보여도 인간적인 것이 좋았어요. 그렇게 따뜻한 생각과 터치로 좀 더 인간성(humanity)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공예적 공간은 보편적으로 공예라고 여기는, 대개 민속적·토속적이라 일컫는 요소가 많으면 완성된다는 관점은 아니에요. 오히려 인간적 태도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가까워요. 작가와 협업하는 것은 그러한 방식의 하나라 할 수 있고요.
가구로 완성한 공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구에도 세심하게 공을 들여요. 공간에서 가구의 역할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건축을 인간적 영역과 건설적 영역으로 나눈다면 가구는 전자에 속해요. 몸에 닿는 터치를 담당하죠. 기성품보다 공간에 맞춰 직접 가구를 디자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카페 온양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창고로 쓰던 허드레 공간을 카페로 고치는 프로젝트였는데, 특히 가구가 중요했어요. 처음부터 공들여 지은 곳이 아니었고 예산도 충분하지 않아서 최소한의 요소를 온전히 잘해내자는 마음으로 작업했거든요. 자세히 보면 테이블 형태가 각기 다르고 의자도 옆으로 길쭉해요. 낮고 수평으로 긴 공간에 비례감을 맞춘 결과입니다.
언급한 카페 온양은 프로젝트를 제안받고 기쁘면서도 부담이 컸다고요.
처음에는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걱정도 많이 하고 자다가 깬 적도 많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김석철 선생님이 설계하신 본관이 있고, 심지어 이타미 준 선생님의 구정아트센터와 마주 보고 있었으니까요. 어깨에 산신령이 50명 앉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두 건물이 다 좋던 이유가 순수함 때문이더라고요. 김석철 선생님은 초기작이었고 이타미 준 선생님은 한국에서 하신 첫 프로젝트였어요. 작품에서도 과장이나 꾸밈이 없이 작업한 마음이 느껴졌어요. ‘어쩌면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온전히 몰입해서 어깨 위 50명의 산신령마저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순수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이후에는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고 작업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난 왜 저렇게 못 할까, 저런 행운이 오지 않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들 때도 많잖아요. 그런 것을 떠나서 주어진 것에 정성을 다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됐어요.
그간의 프로젝트 중에서 공예적 터치가 강하게 드러나는 작업을 꼽아주신다면.
르메르 플래그십은 브랜드와 추구하는 미감이 비슷해서 합이 좋았고, 그 결과 공예적 아름다움이 잘 드러났어요. 제게 주어진 미션은 브랜드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국적인 것을 담는 것이었어요. 한복에 쓰던 누비 기법을 커튼에 적용하고, 신발장을 상상하며 만든 가구에 까맣게 옻칠하는 식으로요. 예전에는 동양적 공간이 단청이나 기와처럼 분위기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면, 르메르에 담긴 태도는 ‘설명하지 않으면 모를 수 있지만 그래도 좋아’였어요. ‘이건 한지야’가 아니라 어느 날 오전에 빛이 깊이 들어왔을 때 ‘한지였구나’ 하고 문득 실감하게 되는 거죠. 꼭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점에서 헌신적인 사랑이라 해야 할까요.(웃음)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요소를 모아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었습니다.
소장님이 생각하는 공예적 건축을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인간적 공간요.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라 말하고 싶어요. 상하농원을 작업한 2015년만 해도 ‘나 디자인이야’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이 멋진 디자인이라 여겼고,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난 작업은 환영받지 못했어요. 요즘에는 각자의 멋짐을 존중하고 가꿔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요. 한국은 한국답게, 임태희는 임태희답게. 저마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거죠.
오설록 로스터리 존(2023)
오설록은 차를 판매하기 이전 단계인 차의 재배, 즉 원자재의 경작부터 실천하는 브랜드다. 방문객에게 브랜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티 로스터리를 구현하게 됐다. 차를 덖고 포장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나누어 표현했고, 방문객은 그 모습을 보며 공간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컨베이어 벨트는 반자동 로스팅을 하는 섹션과 손으로 덖는 섹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장치다. 이 섹션에서 제조한 차는 실제로 현장에서 판매되고, 컨베이어 벨트가 그 과정까지 연결되도록 설계했다.
House of Inspiration(2021)
이 시대에 집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 그저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영감을 주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주거 프로젝트다. 아름다운 뷰를 지닌 작은 아파트는 풍경을 경험하는 특별한 방법을 제안한다. 거실 가구는 가볍고 크기가 작아 언제든지 원하는 위치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 마음 놓고 어지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패밀리룸을 따로 만들어 문만 닫으면 단정한 집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도 포인트다.
카페 온양(2022)
온양민속박물관 안에 카페를 만드는 프로젝트. 시간이 빚어낸 아름다운 정원과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구정아트센터를 마주하고 있어 공간 자체보다 풍경과 차경에 집중하는 장소를 구상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의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 차경이라 생각하며 작업했고, 최소한의 장치가 존재하지만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차별 없이 모두 좋은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잉여 공간을 곳곳에 시공했는데, 그중에서도 한지를 이어 붙여 만든 정자에 공을 들였다.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공간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통해 삶을 관찰하고 밀접한 배움을 얻어가는 집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하며, 매년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만들어가고 있다. limtaeheestudio.com
사진 최용준(@___yjc)
- The Designer 인간적 태도로 짓는 공예적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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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설계할 때 디자이너 임태희의 시선은 언제나 작고 사사로운 것을 향한다. 누군가 꼭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한결같은 애정과 정성으로 매만진 공간에서 우리는 건축이 공예로 변모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