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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최선길 반계리 은행나무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
수백 사람을 품어 그 아래로 할아범도, 아범도, 새악시도 모두 모여들게 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계신다’. 마을을 지켜주는 큰 어른이자, 지혜의 전수 장소요, 감정의 정거장이며, 나약한 인간의 정신적 기도처였던 나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로 꼽히는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 앞에 가면 사시사철 그 나무를 사생하는 화가가 있다. 벌써 4년째다. 1천 호짜리 큰 그림도, 1년 넘게 매일 하루 한 장씩 그린 드로잉도 지치지 않고 완성했다. 그는 왜 이 나무 앞을 떠나지 못하는가.

1천 호 크기 캔버스에 그린 반계리 은행나무의 봄. ‘song of 1k years 1’, 582×259cm, Oil on canvas, 2021.

잎사귀만 무성한 젊은 나무가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숲에 물기가 도는 아침, 반계리 은행나무 위로 부숭한 햇살이 내려앉는다. 햇살을 제 몸뚱이로 받아낸 후에야 나무는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다. 8백 년 이상 만고풍상의 시간을 버틴 나무, 꼭 있어야 할 것만 남겨둔 오래된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뜻을 곱씹어보게 하는 ‘아름다움’, 잎사귀만 무성한 젊은 나무가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화가 최선길의 캔버스 위에도 그 고졸한 미가 가득하다. “2019년에 누군가의 SNS에서 이 은행나무 사진을 보고 그길로 달려갔는데, 보는 순간 쿵! 운명처럼 다가왔죠. 그 후로 4년째 반계리 은행나무만 그리고 있습니다.”


4년 동안 사생하며 깨달은 것
2019년 12월 24일,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 앞에서 첫 드로잉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사생寫生,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40년 가까이 화단을 지켜온 이가 우리조차 초등학교 졸업 후 망각해버린 사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사생이라는 현장은 작가를 완전히 바닥에서부터 다시 출발하게끔 만들어주죠. 현장에서는 내가 계산한 대로 그릴 수가 없어요. 초 단위로 햇빛도 바람도 바뀌는데, 뭘 계획할 수 있겠어요. 주어지는 대로 그 시간을 따라가고 형태를 따라가야 하는 일이니 그저 몸과 몸의 만남, 실존의 만남이죠. 추운 날 야외에서 사생하다 보면요, 몸이 막 빨라지고 그림도 빨라져요. 관념이나 조형성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죠. 구도다 뭐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느끼는 대로 붓질을 하게 돼요. 현장 작업은 인상의 결과물이에요. 오로지 나무와 맞닥뜨린 인상을 현장에서 기록한 그림이니까요. 존재와 인상이 만나는 매 순간이죠.

그렇게 만 3년 동안, 3백 장 정도 그렸어요. 그 나무가 내게 ‘존재는 그 자체가 힘’이라는 깨달음을 줬죠. 물론 그전에도 ‘존재의 힘’ 이런 걸 생각했지만 그건 머리로 안 것이고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4년 동안 대면하면서 ‘아,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것이구나’ 몸으로, 마음으로 실감했어요. 제 그림엔 배경도 없이 나무만 존재해요. 나무의 형태, 그 형태 안에 빛이 스미고 바람이 지나는 상태. 그 안에 포스트모던적 요소가 다 있어요. 한 가지 대상에 이렇게 다양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 이게 다원성이고 시간성이고 포스트모던이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 말이죠.”




위부터 반계리 은행나무의 여름, 가을, 겨울. ‘song of 1k years’ 연작, 582×259cm, Oil on canvas, 2021. 실제 나무 앞에서 60호 캔버스에 사생한 뒤 작업실에서 확대해서 1천 호 캔버스에 그린다.
카이로스의 시간
그가 처음 그린 은행나무는 겨울나무였다. 겨울이 오기 전 얼지 않기 위해 오히려 옷을 벗는 나무, 몸에 있는 물기를 치밀하게 빼버린 나무.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몸짓에서 삶의 역설을 배웠다. 그렇게 달포쯤 견디면 곧 또 다른 봄이 올 것임을, 겨울나무가 제 팔다리에 꽃눈을 눈꽃처럼 틔울 것임을 나무에게서 배웠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그리기 전부터 저는 30년 넘게 나무만 그려왔어요. 첫 전시에서 33세의 예수,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의 아들 예수를 그렸지만 곧 나무에 천착하게 됐죠. 어느 날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가 마치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성경에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등등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한 구절이 많아요. 나무가 사람을 은유하는 좋은 소재가 되겠다 싶었죠. 그때부터 인간 군상처럼 늘어선 잡목을 한동안 그렸고, 나무의 구성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미에 천착하기도 했고요. 반계리 은행나무를 본 순간 지난 30년간 그려온 나무 그림들의 결정체를 만난 듯 놀라웠습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생명나무가 그런 모습일 것 같았어요.”

그 현세의 생명나무를 사생하며 그가 느끼는 시간은 수직적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평적 시간, 즉 크로노스Cronos의 시간과 구별되는, 영원하고 초월적인 카이로스의 시간. “나무의 시간은 사람의 사계와는 좀 다르게 지나가요. 나무는 겨울에 가장 치열하더군요. 겨울이면 나무가 뒤집힌 것처럼 뿌리가 입처럼 뻗어나가며 땅속에서 열심히 물을 빨아당기죠. 아, 생명의 숨은 이야기가 저 안에 다 있구나,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저 시간을 이해하거나 흉내 낼 수는 없겠구나. 그러니 그 앞에서 나는 사라지죠. 정신없이 그냥 느끼는 대로 쫓아가며 두 시간, 세 시간 그리고 나면 이렇게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그때마다 울컥울컥해요. ‘나는 훈련을 너무 많이 받아 그동안 머리로만 그렸구나. 위대한 선배 화가들이 해내지 못한 ‘나만의 그림’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나 아닌 나로 가득 찬 그림만 그렸구나’ 하고 깨달았으니까요. 그저 나무 하나에만 집중하고 그렸을 뿐인데, 이제야 최선길이 거기 있는 거예요. 나무와 저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이죠. 이게 반계리 은행나무를 계속 그리는 이유입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높이가 32m, 둘레가 16.27m에 이르는 거목이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8백 년 정도로 추정(1964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하는 고목古木으로, 줄기와 가지가 균형 있게 퍼진 채 무성하게 잘 자라는 몇 안 되는 고목高木이다. 수나무이지만 수형은 가지를 옆이나 아래로 뻗는 암나무 형태를 띤다. 나무 한 그루인데도 마치 10여 그루 나무가 한꺼번에 자라서 이룬 숲처럼 보여 명실상부 ‘전국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1천1백 년가량)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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