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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룡미술관 제주에 깃든 건축가의 예술혼
건축가 이타미 준의 바람 같은 궤적이 비로소 제주의 자연 한가운데 몸을 누였다. 그의 건축을 이끌던 철학도, 작품 속에 새겨온 전언도 고스란히 품에 안았다. 지난해 12월, 제주 서부 중산간 지역에 문을 연 유동룡미술관 이야기다.

나지막한 지붕의 곡선과 제주를 형상화한 타원형 돌출 구조가 인상적인 유동룡미술관. 건물 전체를 빌레가 감싼다.
오랜 세월 제주 땅을 각인해온 단 하나의 요소를 꼽는다면 아마도 그건 바람일 것이다. 거친 기세로 손쓸 틈 없이 밀려 들어와 검은 대지를 후려치는 바람. 굴곡진 섬의 역사를 끌어안고 돌과 나무와 흙에 깃드는 바람. 건축가 이타미 준이 사랑하던 제주의 바람이다. 1937년 재일 교포로 태어나 자신만의 독보적 건축 세계를 구축한 그는 제2의 고향 같던 제주에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다. 제주의 자연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고, 실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뜻도 종종 내비쳤다. 그러니까 이타미 준의 사후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 제주 땅에 자리 잡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지난해 12월, 아득한 용암 궤적을 따라 곶자왈의 거친 숨결이 고인 서부 중산간 지역에 그의 본명을 내건 미술관이 둥지를 틀었다. 평생 경계인으로 살면서도 ‘이타미 준’이란 예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던 그의 시간을 회고하기 위해서다.


측면에서 바라본 미술관 외관. 좌측에 쌓은 담을 따라 건물을 반 바퀴쯤 돌아서 내부로 들어간다.
유동룡미술관은 저지예술인마을 안에서도 좀 더 외진 구석에 자리했다. 도로에서 한 뼘쯤 떨어져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벽지僻地 너머 암반 지대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앉은 지붕의 모양새가 오래된 제주 민가를 연상시켰다. 지극히 ‘이타미 준다운 건물’을 키워드로 그의 딸이자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인 유이화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사장이 설계한 작품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사상과 철학을 의식하며 건물을 올리고 안팎을 다듬었다는 의미다.

본질을 중시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 지역과 풍토,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건축. 그의 아버지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해온 명제다. 실제로 기공식 직후 땅 밑으로 거대한 빌레(용암 이 굳어 형성된 평평한 암반)가 드러나자 건물이 이를 ‘안도록’ 설계도를 변경하느라 착공을 6개월이나 늦추기도 했다. “제주도 형태인 타원형을 중심부에 두고 설계했어요. 제주에 뿌리내리 고, 제주를 중심으로 뻗어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거죠. 기능적으로는 이 타원형을 ‘이타미 준의 공간’으로 설정했고요.” 건물 안에 들어서면 중앙의 타원형 구조는 더 명료하게 시야를 가로지른다. 1층에는 이타미 준 관련 서적을 채운 라이브러리 ‘먹의 공간’이, 2층에는 이타미 준의 작품만 전시하는 상설 전시실이 미술관의 작은 제주 안에 담겨 있다. 그 가장자리를 티 라운지 ‘바람의 노래’와 아트 숍, 교육실과 기획 전시실 등이 둥글게 둘러싼 형태다.


미술관 2층의 타원형 구조 안에 담긴 상설 전시실. 이타미 준의 대표 작품을 스케치와 모형, 사진 등을 통해 소개한다.
아버지의 건축적 정수 안에 ‘본질의 힘을 회복하는 공간’을 담기 위해 유이화 이사장은 안팎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건축과 인테리어는 물론 내부를 감싸는 향과 음악, 티 라운지의 차 한잔까지 무엇 하나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와도 만났다. 한서형 조향사와 함께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던 고서적 냄새며 묵향을 재현해 미술관의 시그너처 향으로 삼았고, 작곡가 양방언이 직접 큐레이션한 BGM 리스트로 공간을 채웠다. 녹차에 박하와 조릿대, 청보리순을 블렌딩해 ‘바람의 노래’를 표현한 시그너처 차는 로컬 티하우스 우연못의 작품. 배우 문소리와 정우성, 에스파의 카리나와 지젤 등 대중문화 아티스트 4인이 참여한 오디오 도슨트도 특별하다. 아트 숍 역시 마찬가지. 이타미 준의 저서와 아트 프린트 작품 외에도 그에게 영감을 받은 여러 작가의 창작물이 또 하나의 전시를 이룬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의 금속 브로치와 유리 공예가 가즈미의 유리 항아리, 도예가 이기조의 달항아리와 백자 함 등 모두 이타미 준의 철학과 사상을 모티프로 완성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유이화 이사장은 관람객이 자연에 둘러싸인 공간 전체를 충분히 보고 느끼며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길 소망한다. 시간당 관람 인원을 제한해 공간 밀도를 조절하고, 입장권에 시그너처 티 교환권을 포함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다. 현재 진행하는 개관전은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 첫 전시인 만큼 그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선보이고 있지만, 향후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조명해볼 예정이다. 유동룡미술관의 김선경 총괄은 특히 ‘먹의 공간’이 선사하는 환대의 순간을 놓치지 말 것을 조언한다. “유동룡 선생의 저서와 직접 수집한 고서 및 골동품, 첫 작품인 ‘어머니의 집’ 모형이 고요하고 따뜻한 첫 인사를 건네는 공간이지요. 바람의 노래에서 시그너처 차와 말차 아이스크림도 꼭 즐겨보기를 추천해요. 통창 가득 만나는 제주의 자연이 짧은 시간 동안 회복의 에너지를 제공할 겁니다.”


주소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906-10 문의 0507-1385-2678



유이화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사장 
건축을 통해 본질을 회복하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미술관을 설립하기까지 고민이 깊었다고 들었어요.
물리적 어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과 의미를 찾아야 했거든요. 단지 ‘딸로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철학과 정신, 지향점을 갖고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역시 깊었죠. 그런데 계속 이렇게 머뭇거리다가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부지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기자간담회부터 연 것도, 좌담회를 통해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구한 것도, 일단 공표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가 뭐든 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에요.


티 라운지인 바람의 노래에서는 제주의 로컬 티하우스와 협업해 엄선한 제주산 차 메뉴를 선보인다. 생전 차를 즐겨 마시고 손님에게도 차를 대접하던 이타미 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럼 고민 끝에 어떤 명분과 의미를 찾았나요?
사실 저는 지금도 계속 아버지를 발견해가고 있어요. 물론 어릴 때부터 본 아버지지만, 저 역시 건축가로 살며 점점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는 거죠. 무엇보다 아버지는 작품을 통해 이 사회가 의식해야 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온 분이더라고요. 자연을 대하는 건축가의 태도에 대해, 또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로서 건축의 역할에 대해. 이타미 준이라는 건축가의 사상과 철학이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하다는 생각, 저 혼자만 발견하고 배우기에는 너무나 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 ‘아버지의 작품이 그러했듯 미술관을 통해 지금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던져야겠다’고. 요즘도 건축설계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늘 그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데, 일단 재단이 세운 큰 줄기는 교육이에요. 이미 어린이 건축학교를 운영하며 지난해에만 2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만났어요. 이제 미술관이 생겼으니 오프라인 수업도 점점 더 확장해나가야겠죠.

제주에서도 특히 이 지역을 미술관 터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운 좋게도 저지예술인마을의 문화 도유지 내 일부 필지에 관한 공고 소식을 들었어요. 그 안에서 최대한 밀도가 낮은 땅, 자연과 가까운 땅을 찾은 거예요. 실제로 이곳은 당시 야생의 숲 자체였는데, 처음 방문했을 때 흰말 한 마 리가 숲 한가운데 서 있었어요. 말과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여기구나 싶었죠. 가까이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있는 것도 좋았어요. 청년 시절부터 아버지와 가까웠던 분이거든요.


이타미 준의 저서와 그가 영감을 받은 작가들의 책을 볼 수 있는 라이브러리. 먹의 공간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깊은 사유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본질의 힘을 회복하기 위한 공간’이란 슬로건은 어떤 의미인가요?
아버지가 70세를 넘기면서 저에게 가장 기쁘게 말씀하신 게 “이제야 나만의 오리지낼리티가 뭔지 알 것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방주교회를 설계하실 무렵이었죠. 그때 저도 적지 않은 나이의 건축가이던 터라 충격을 받긴 했지만, 아버지가 지금껏 건축가로 살아온 삶이 본인의 오리지낼리티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역으로 알게 됐어요. 어떤 분야에서든 그것이 최고의 성공이라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과연 지금의 현대인은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지니고 있는가? 그저 거대한 시대 조류에 휩쓸린 채 그걸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미술관이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슬로건을 정했어요.

앞으로 유동룡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사실 이타미 준을 깊이 아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소수잖아요. 저는 딸로서, 또 제자로서 보다 많은 사람이 이 미술관에서 이타미 준이란 건축가와 만나면 좋겠어요. 어떤 의도로 건축을 해오던 사람인지, 건축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 제대로 느끼고 마주했으면 해요. 그게 첫 번째 목표예요. 그런 다음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유동룡미술관이 그렇게 ‘나에게로의 확장’을 돕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글 류현경 | 공간 사진 김용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