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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민정화 내가 버린 마음들에 대하여
마음이 떠돌던 풍경을 그림과 도자기, 책 등으로 선보이는 작가 민정화. 독일 시골 마을에서 그가 보내온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잊었거나 방치해놓은 마음도 수집해보고픈 욕구가 솟는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민정화는 회화, 그림책, 프린팅 그리고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작업합니다. 2006년부터 베를린에서 가까운 시골 동네에서 작업하면서, 서울을 오가며 활동합니다. 가내수공업 형태의 리소 인쇄로 만드는 그림책과 프린팅을 작업하던 작가는 2018년부터 시작한 ‘관상식물’ 회화 시리즈로 베를린과 서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2020년부터 회화·그림책·도자기 오브제로 작업한 ‘움직이는 마음들’로 2022년 팩토리2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우울, 나르시시즘, 콤플렉스, 집착, 번아웃, 행복, 사랑…. 아무도 모르는, 나조차도 모르는 내 마음속 폭풍을 누가 좀 들여다봐주기를, 그 마음을 돌봐주기를 바란 적 있나? 화가 민정화는 그 이름 없는 마음에 이름을 지어주고, 감기처럼 들락거리는 숱한 마음에 번호를 붙이고, 그들의 상태를 살피고, 보존 방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다. 마치 아주 사적인 하바리움herbarium(식물 표본실)을 만드는 것처럼. 형태도 색도 질감도 알 수 없는 마음을 그린 그의 그림은 묘하게도 구성적이어서 책가도 같기도, 기하학적인 그래픽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철새와 돌, 건물, 자연의 빛이 떠오르는 형상이지만 몹시 추상적이다. 마음을 객체화한다는 것, 유형화한다는 것, 그 심오한 일에 빠진 화가 민정화. 생각해둔 이야기가 열여섯 개 정도 남아 있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를 하나하나 꺼내가며 그림과 글로 만들겠다는, 독일의 한국 여자 이야기다.

오랫동안 독일에서 살았고, 5년 전부터 시골 마을 게르스발데Gerswalde에서 작업하고 있잖아요. 독일에서의 삶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한국에서 제 인생의 비전을 찾지 못했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 되고 싶지 않은 것, 그리고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지만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며 주로 북 디자인을 하다 20대 후반에 독일로 왔어요, 무작정. 처음 와서 언어를 배우면서 베를린의 미술대학에 존경하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가 교수로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죠. 학교에서는 테크닉과 관련한 것을 거의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스스로 끝마치는 게 목표였죠. 바로 제가 공부하고 싶던 방식이었어요. 이야기를 만들고, 구현 방법을 모색하고, 그림을 그린 후 골라낸 결과물을 손으로 스크린 프린트하고, 제본해 프레젠테이션하는 과정요. 그러면서 작업자의 태도를 배웠어요. 느리지만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태도죠.

졸업 후 12년간 베를린에서 살다가 2017년,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려고 게르스발데로 이사했어요. 이주할 때 두 가지를 결심했는데,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것, 그림에 방해되는 일은 최소한으로만 만들며 사는 것이 었어요. 6년쯤 됐는데 서서히 그런 방향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어쩌면 이게 행복이 아닐까 싶고요.


‘마음 #4’, 캔버스에 안료, 800×1000mm, 2022. 사진 악셀 렘브레테.
2020년부터 시작한 ‘마음’ 연작에 대한 설명 중 이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버린 마음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 화가 민정화가 버린 자신의 마음, 마주한 다른 이들의 마음, 그들과 나눈 대화가 작업의 바탕이잖아요. 어쩌다 ‘마음’에 집중하게 된 거죠?
‘움직이는 마음들’ 작업은 제 내면에 숨어 있는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작이었어요. 코로나19가 시작될 무렵이고, 한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이 끝난 뒤였죠. 새로운 이야기를 신나게 구상하다가도 잠들 무렵이 되면 무언가 마음에서 덜컹거리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죠. 계속 모른 척하다가 끝끝내 도달한 곳에서 마주칠 공허가 무서웠거든요. 그래서 일단 모든 것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만들었어요. 제가 무서워하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면서요. 그다음에 그들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말이죠.



독일 시골 마을에 오가는 철새, 동물, 변화하는 자연의 빛이 그림과 글에 스민다. 요즘엔 이웃 마을까지 숲길을 달려 돌아오는 일에 빠져 있다.
숨어 있거나 방치해놓은 마음들’을 찾아낸 방법을 좀 들려주세요. 예술가가 아닌 우리도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인생이 좀 달라질 것 같거든요.
마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는 용기가 제일 필요했어요. 그다음으로 끈기가 필요했고요. 그 과정에서 불에 덴 듯 놀랄 때도, 칼에 베인 듯 아플 때도 있었지만, 몇 번을 넘어서자 용기의 근육이 키워지더라고요. 그렇게 연민을 객관화하려 노력하니 눈물도 좌절도 더 이상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태는 되지 않더라고요. 바닥을 본 불행은 더 이상 저를 짓누를 수 없는 것처럼.

마음에 번호를 붙이고, 그 마음의 보존 방법을 기록하는 작업도 흥미로워요. 무형의 마음을 유형화하는 것이니까요.
처음에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어요. 본 적도 없는 마음을 그리다니요. 그래서 찾은 방법은 식물 표본집에서 본 것처럼 마음을 다루는 것이었어요. 투명해서 찢어질 것 같은 꽃잎, 실처럼 가는 뿌리 가닥을 하나하나 펴서 테이프로 조심스럽게 붙여놓잖아요. 그리고 그 식물의 특징을 간결하고 객관적으로 적어놓고요. 세심한 행위와 차가운 문장이 빚어내는 마술 같은 결합이 그 식물을 더 세밀히 들여다보게 하죠. 제 마음도 그렇게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들을 하나씩 노트에 적어나가면서 모양을 빚기 시작했어요. 색과 질감, 모양, 온도 등을 특징지으면서 말이죠. 흙과 돌에서 나온 안료를 사용하는데, 특별히 ‘마음’ 작업에서 이런 재료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마음을 그리면서 재료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일처럼 재료도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적절히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통적 안료를 찾다가 흙과 돌 안료를 발견한 거고요. 안달루시아산 황토, 독일산 석회 같은 출처가 명확한 재료가 지닌 색감과 재질에 매료됐죠. 마음에 색이 있다면 우리가 발 붙인 땅이 부서지고 깨지고 뭉친 흙이나 돌 같은 색일 거라고 생각해요. 마음은 그것과 매우 닮았거든요.


베를리너들이 사랑하는 시골 마을, 게르스발데의 작업실에서. 오전엔 도자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사진 얀 린드버그.

‘마음’ 작업을 하기 전 선보인 ‘관상식물’ 연작. ‘Houseplants #57’, acrylic and airbrush on paper, 300×240mm, 2020.
작년 연말 개인전 <움직이는 마음들>을 열면서 전시와 함께 그림책 <움직이는 마음들>을 엮었잖아요. 그림책 속 열두 개의 마음에 관한 글을 친구들이 낭독한 인스타그램(@jeong.hwa.min) 영상도 흥미로웠어요. ‘낭독’ ‘그림책’ 같은 것이 화가 민정화의 세계를 좀 더 넓게 구현하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책, 동화책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열 살 넘어가면 보통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잖아요. 세상은 내가 봐온 책과 대비해 너무도 시시했어요. 세상이 이럴 리가 없다고 느꼈고, 세상에 실망할수록 책의 소중함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세상에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하던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겨났어요. 책을 만드는 디자인 회사에도 들어가보고, 유학도 가게 된 계기였죠.

표지 작품 ‘마음 #25’의 구성적 화면이 묘하게도 우리 그림 책가도를 닮았어요.
책가도의 그래픽, 내용 그리고 그 용도까지 모든 걸 좋아해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그들이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 사물, 그러나 실제로는 갖지 못한 신기루 같은, 혹은 아름다운 소문과 같은 사물을 쌓아 정돈해놓은 것이 책가도잖아요. 책가도는 제가 마음을 선반 위에 올리는 것과 아주 흡사해요. 아주 오랫동안 사모한 그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표지 작품 ‘마음 #25’는 책가도에 사물을 올리듯 여러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서로 지탱하며 균형을 잡는 모양이에요. 하나하나의 마음은 잘 닦여서 각자의 빛을 내죠. 무엇보다 그들은 아주 편안한 상태입니다. 무엇 하나도 희생하거나 잊히지 않고 각자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풍경이죠.

글 최혜경 기자 | 인물 사진 정해민, 얀 린드버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