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체르너Cherner by Norman Cherner
2, 7 로로피아나Loro Piana
3 타사키TASAKI
4, 11, 13 랄프 로렌Ralph Lauren
5 막스마라MaxMara
6 샤넬Chanel
8 펜디Fendi
9 블랙핑크 리사BLACKPINK LISA
10 로지 헌팅턴 휘틀리Rosie Huntington Whiteley
12 까르띠에Cartier
14 페라가모Ferragamo
15 랄프 로렌 홈Ralph Lauren home
에르메스Hermès
요즘 패션계의 화두는 ‘올드 머니’다. 올드 머니라는 용어가 계급주의를 옹호하는 것 같아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조용한 럭셔리’라는 대체어도 있다. 사실 <행복> 독자에게는 올드 머니 룩이든 조용한 럭셔리든 모두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테리어는 언제나 올드 머니의 취향 격전지였고, 패션보다 교체 주기가 긴 만큼 항상 클래식이 유행과 공존한다. 인테리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올드 머니 패션도 눈에 익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요즘 마케팅은 해시태그 선점 경쟁이다. ‘아메리칸 클래식’ ‘프레피 룩’ ‘크루즈 룩’ 같은 오래된 단어가 ‘올드 머니 룩’으로 대체되었을 뿐인데, 그것이 지난 1년간 틱톡 최대 유행어가 되었다. 켄들 제너, 카일리 제너 같은 젠지Gen Z들의 패션 아이콘이 갑자기 요조숙녀처럼 입고 다니고, Y2K 유행이 20세기 케네디 집안 며느리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패스트 패션에 익숙한 틱톡 세대는 올드 머니 룩 자체가 신선하기도 할 것이다.
올드 머니는 ‘벌기보다 물려받은 재산’을 뜻하는 단어다. 돈과 함께 훌륭한 취향까지 대물림해온 가문은 한국이나 서양이나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 올드 머니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패션계의 올드 머니 현상은 철저하게 이미지에 기반한다. 노동으로 부를 쌓은 ‘뉴 머니’가 선명한 로고, 화려한 스타일로 능력을 과시하려 든다면 올드 머니는 보수적이고 조용하게 수준을 드러낼 거란 환상 말이다.
이번 올드 머니 유행이 주목한 ‘부의 코드’는 예컨대 이런 것이다. 캐시미어·트위드·리넨·코튼·데님처럼 클래식한 소재, 모노톤과 뉴트럴 톤의 차분한 색감, 느슨한 실루엣, 절제된 디자인, 진주와 다이아몬드처럼 색 대신 반짝임을 더해주는 주얼리, 고급 테일러링…. 요약하면 크리스티 경매에서 골동품을 사들이고 주말에는 가족 별장에서 승마를 즐기는 할머니에게서 돈과 함께 취향까지 물려받은 모습이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반영한 테니스 룩, 크루즈 룩, 미니멀한 이브닝드레스 등도 인기다. 여느 유행처럼 이것을 황급히 응용하기 위해 패스트 패션 브랜드로 달려가는 건 의미가 없다. 올드 머니 룩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은 첫째도 품질, 둘째도 품질, 셋째도 품질이다. 품질이 스타일을 결정한다.
올드 머니 룩의 가장 좋은 참고 자료는 20세기 랄프 로렌 화보다. 다이애나 비, 재클린 케네디, 캐럴린 진 베셋 케네디도 다시 불려 나왔다. 그들의 스타일은 잘 관리한 부드러운 머릿결, 색조를 절제하고 본연의 피부색을 살린 메이크업, 단정한 손톱과 눈썹 등으로 완성된다. 현재진행형 아이콘으로는 팝 스타 라이어널 리치의 딸 소피아 리치가 있다. 요즘은 상속녀도 퍼스트레이디도 최종 꿈은 인플루언서인 시대다. 올드 머니 유행은 부모의 유명세에 힘입어 손쉽게 셀러브리티로 등극하는 ‘네포 베이비(족벌주의를 뜻하는 nepotism과 baby의 합성어)’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있다. 그 최대 수혜자가 소피아 리치다. 남성에게는 대부호 집안의 상속 분쟁을 다룬 HBO 드라마 <석세션>이 완벽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소피아 리치Sofia Richie
올드 머니의 어원과 참고 자료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아무나 범접 못 할 유행은 아니다. 오히려 불황, 긴축, 환경 재난 시대가 이 유행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다. 내일이면 촌스러워지거나 헐어서 못 쓸 물건을 여러 개 사는 대신 자식에게 물려줄 좋은 물건 하나를 사는 게 환경에도, 가계에도 낫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항상 유행에 패배하고 말았다. 교훈적인 말로는 소비자의 변덕스러운 욕구를 제어할 수 없다. 같은 내용이라도 “올드 머니 룩이 대세입니다!” 하는 편이 훨씬 관심이 간다. 젠지들은 유서 깊은 브랜드의 중고 제품이나 신진 디자이너 제품에서 올드 머니 룩의 답을 찾기도 한다. 튀김기 속 팝콘처럼 빠르게 튀어오르는 자잘한 유행에 눈 돌리지 않고 오래갈 디자인을 고를 것, 품질과 장인 정신에 합당한 존경을 보낼 것, 브랜드가 아니라 감성이 당신을 표현하게 할 것, 이게 바로 올드 머니 룩의 전략이다. 아니러니하게도 이 모두가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해 권장하던 것이다.
올드 머니 유행은 인테리어와도 밀접하다. 랄프 로렌 홈을 이상향으로 두고 산뜻한 리넨과 네이비 포인트, 대리석·황동·크리스털·원목 등 고급 소재를 활용하는 건 이 유행에 접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보태니컬, 스트라이프, 체크 등 클래식한 프린트 벽지도 관심을 모은다. 세대가 바뀌어도 가치가 바래지 않을 것에 투자함으로써 우리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올드 머니 홈을 꾸릴 수 있다. 이때 핵심으로 거론되는 것이 삶의 방향을 드러내는 수집품이다. 회화, 가구, 오브제, 식기, 도서, 여행 기념품 등 오랜 시간 공들인 컬렉션은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장인 정신과 품질, 오리지낼리티는 이 컬렉션에 영속성을 부여해줄 것이다. 인테리어가 아니라 큐레이션 관점에서 우리 집을 다시 둘러볼 때다.
올드 머니라는 키워드가 디자인계를 강타한 현상에 대해 havenly.com의 디자인 에디터 헤더 거즌Heather Goerzen은 이렇게 분석한다. “사람들이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유행을 좇는 데 조금 지친 것 같다.” 우리가 올드 머니의 피상속인이 아니라 상속인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이 키워드를 해석하면 거즌의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음 세대까지 지속 가능한 불변의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까? 미심쩍을 만큼 섹시한 해시태그를 달고 부활한 이번 유행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글을 쓴 이숙명 작가는 영화 잡지 <프리미어>, 패션 잡지 <엘르>와 <싱글즈> 기자를 거쳐 대중문화 및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베스트셀러 에세이 <혼자서 완전하게> <사물의 중력> <나는 나를 사랑한다>를 펴냈고, 인도네시아 발리에 거주한다.